[문화매거진=MIA 작가] 지난 휴일, 나는 쉼을 위해 조르주 페렉의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를 읽었다. 2월 구정 연휴와 3월 1일, 총 두 번.
‘쉼을 위해 책을 읽는다'는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책이라도 읽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집중력은 필요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내게 휴일의 분위기처럼 풍겨왔다. 이상했다. 특히 ‘온전한 쉼’을 만들어내기 위해 쉼을 가장한 다른 행동들-책 읽기나 영상 시청 같은-을 하지 않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요즘을 생각하면 더 말이 안 되는 결과였다. 이유는 페렉이 취하는 서술 전략과 내가 좇는 쉼의 이미지가 일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페렉은 1974년 10월, 3일간 파리 6구의 한 장소(생-쉴피스 광장 주변)의 어느 카페에 앉아 자신이 본 것을 종이 위에 모두 기록해 내는 ‘시도'를 한다. 가령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문을 밀지 않고 당기기 시작한다 유령같은 행위들
지나가는 70번 꽉 참
(피곤함)
지나가는 96번 절반 참
새로운 조명들이 카페를 밝힌다.
밝은 석양이 한창이다
지나가는 63번이 꽉 찼다
자전거형 오토바이를 밀면서 한 남자가 지나간다
지나가는 70번이 꽉 찼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초신선란'을 실은 트럭이 지나간다
여섯시 오분 전이다
-조르주 페렉,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49쪽 (김용석 옮김 / 신북스)
파리라는 장소 특성상 ‘로크포르 소시에테'라든지, ‘샹-드-마르’라든지 한국의 분위기와는 먼 고유명사들이 대거 출몰하지만,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집 앞 사거리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는 듯한 느낌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가 기록한 내용은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상적 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페렉이 서두에서 밝혔듯 이런 종류의 정보는 “보통은 언급하지 않는 것들, 주목하지 않는 것들, 중요하지 않은 것들 … 날씨가 변하는 것, 사람들과 자동차들과 구름이 지나가는 것”(17)처럼 너무 사소하고 평범하다. 그가 왜 이런 ‘부질없는’ 기록을 했는지에 관한 이유를 궁금해하기보다, 나는 그가 이 문장 말미에 무심하듯 결정적으로 남겨놓은 표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것.”에 주목했다. ‘그것’의 존재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다음 사실에 근거하여: 페렉의 기록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쉼에 있을 때 겪는 경험과 비슷하다. 달리 말하면 내가 안정된 쉼이라 여기는 상태는 페렉이 기록한 방식으로 풍경을 인식하는 상태이다. 그리고 이때 ‘일어나는 바로 그것’을 발견하곤 한다. 정확히는 ‘그것’이 내게 온다.
‘그것’은, 불현듯 얼굴을 드러내는, 작업을 위한 내적 재료 아니면 동기 혹은 이야기, 결국 의미에 관한 것이다.
한때 일하는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을 모두 작업하는 시간으로 분배했던 적이 있다. 작업에 목말랐고,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당시엔 작업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으나, 그런 상태를 몇 년 이어오니 정신적, 육체적인 한계가 왔다. 이런 방식으로 삶을 지속하는 일이 도무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일이나 작업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어떤 결정적인 선택의 직전에도 몇 번 다다랐었다. 그러나 해결은 의외로 다른 이름의 시간, ‘쉬는 시간'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휴식할 때 어떠한 행위라도 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그림을 보거나 영화를 보고 짤막한 글을 읽는 행위는 나를 즐겁게 하거나 지식을 채우는 등 유익한 결과를 남기는 것 같았지만, 어찌 됐든 에너지를 요구했다. 그런 건 내가 원하는 쉼은 아니었다. 무작정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생각을 극도로 바쁘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 답이 아니었다. 나는 즐거움도 지식도, 그 무엇도 얻지 않는 방식을 찾고 있었다.
원하는 쉼의 모양에 가장 가까운 구체적 행동 양식은 ‘걸으며 주변 정보를 읽기'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 행동이 성립하기 위한 장소로는 인적이 드문 곳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생활감이 묻어나는 곳이 더 좋다. 나의 의지 밖에서, 나와 아무 상관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 손, 강아지, 누군갈 부르는 목소리, 대답하는 말투, 느리거나 빠른 나와 다른 걸음들에 집중하기. 머릿속으로 재빨리 정보를 말의 형태로 바꾸기, 감상은 접기. 시선을 내게서 외부로 옮기면 생각의 중심도 그렇게 된다. 천천히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는 순간, 비로소 맑은 숨을 쉬는 기분이 든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좀 설명하기 어렵고, 기적 같다. 내가 찾던 ‘것 같은' 이야기의 파편이 마치 미세한 바람이 불듯 외부의 풍경으로부터 실려 오기 시작한다. 때때로 온도나 강도에 차이는 있다. 나라는 과녁을 향해 쏘인 화살처럼 날아와 박힐 때도 있고,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들리며 천천히 커지는 음악같을 때도, 섬광처럼 순간 번쩍여 사라질 때도 있다. 공통점은, 어떤 형태이든 알아챌 수 있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멀어져야 새로 다가오는 풍경을 편견 없이 맞을 수 있게 하는 쉼의 특질이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항상 이야기를 찾고 있는 상태, 주제에 시달리는 상태이기에 이런 방식의 쉼이 어울리게 된 것 같다. 작업의 요체를 이루는 의미를 오래 생각하면 때론 너무 무거워져서 오히려 텅 빈 곳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특히 자기 의심에 빠지기 쉽고, 내 안에 일어나는 저항은 자주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 때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의미의 진실성-작업 주제나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이 왜곡될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
페렉의 이 작품은 ‘파리의 한 장소를 철저하게 묘사하고 소진시키고 고갈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에세이'이다. 그런데 페렉의 ‘시도'는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고갈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이와 동시에 오히려 파리의 한 장소에 의해서 페렉이 소진되는 것, 녹초의 상태가 되는 것, 기진맥진해지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책, 87쪽, 옮긴이의 말
옮긴이의 설명과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페렉이 ‘피곤하다' 고백하듯, 기록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럴만하다. 눈앞에서 그야말로 ‘벌어지는' 그래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상황을 기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기에. 이 글은 ‘기록하기’, 나의 쉼은 ‘지나치기’라는 각기 다른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그는 소진되고 나는 쉴 수 있었다는 차이가 당연한 것 같으면서, 그가 소진된 덕분으로 나는 나의 쉼을 한 번은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결과가 어떤 면에선 두 행위의 본질이 같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 이 경험을 토대로 정의하게 된 이러한 쉼은, 그 자체로 온전하게 존재하기보단 작업을 해내기 위한 연료가 되어 타오른다. 이건 아이러니하면서 말이 된다. 마치 작업을 하는 이유와 지속하는 이유가 같아야 한다는 생각처럼. 휴일이 가진 무의미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어느 날을 기억한다. 한차례 바쁜 업무들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한낮의 햇빛을 좇아 공원까지 다다랐다. 천천히 걸었다. 벤치에 앉아 맞은편 호수를 바라봤다. 반짝이는 물결에 순간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 감정은 돌아다니는 강아지 종류를 세는 방식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 새끼 오리의 움직임에 눈길을 두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하얀색 패딩, 검은색 패딩, 코트, 긴 머리, 뛰어가는 여자를 따라잡는 남자, 강아지 앞에 멈춰 서는 모녀. 가방에 있던 책을 펼쳐 읽었고 결정적인 구절을 발견하고 편하게 울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세상을 생각하는 일은 지금 내가 본 것과 다르지 않은 의미로 가득할 것이란 예상은, 본 것을 그림에 그대로 담아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번졌다. 작업과 삶의 경계가 흐려졌다. 그건 아름다운 자유로움이었다.
*위의 책에서 옮긴이가 번역하는 행위와 원서 ‘시도'의 어원을 언급하며 사용한 표현이며, 나는 칼럼의 제목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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