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외곽의 붉은색으로 칠해진 어느 2층짜리 건물에서 유명 주술사 쿠스모 키 쿠스모를 만났다.
향불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이곳 사무실에서 쿠스모는 “내가 돕는 이들은 반드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은 검, 대리석 조각상, 나무 가면 등으로 장식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쿠스모는 눈을 감고 손으로 원을 그리며 기도를 올렸다. 무언가 속삭 거의 들리지 않는다.
쿠스모는 자신이 “전통 의학, 영적인 힘, 최면”에 능통하다고 했다.
사업 거래를 마무리할 최적의 날짜를 골라달라는 고객부터, 결혼 생활이 과연 이혼으로 끝날지 점쳐달라는 고객까지 매일 그에겐 다양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5년마다 열리는 총선이 가까워져 올 때쯤 정치인들도 그의 영적 조언을 구하고 정치적 운명을 점쳐보고자 쿠스모를 찾아온다.
그리고 올해 2월 14일, 2억 명이 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대통령, 중앙 및 지방 의원들을 뽑으러 투표장으로 향하게 된다.
쿠수모는 선거일 전 몇 달이 인도네시아 전역의 주술사들에게 가장 바쁜 시기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현지에선 ‘두쿤’이라 불리는 이러한 주술사들의 역할에 대해 논란도 많고 의견이 갈린다.
일부 원주민 및 전통적인 공동체에선 주술사들이 치료, 수호, 영적 세계와의 조화 유지 등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는다.
사실 인도네시아에선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서 악천후를 막고자 소위 ‘비 주술사’를 고용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일례로 2022년 롬복에서 열린 모터사이클 그랑프리’를 앞두고도 이러한 ‘비 주술사’가 나섰다.
하지만 많은 인도네시아인들, 특히 청년 세대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일례로 자카르타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일하는 기나스티 라마단티(32)는 정치인들 등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주술사들의 작업이 “사기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라마단티는 “나는 주술사나 영적 지도자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을 찾아 도움을 구했지만 여전히 실패한 이들도 많기 때문”이라면서 “이들의 고객이 실제로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는 증거가 없다. 설령 이들이 이기더라도 그게 주술사 덕이라는 확신도 없다”고 지적했다.
‘웰컴 글로벌 모니터’가 지난 2020년 인도네시아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3%는 전통 치유사를 “매우” 신뢰한다고 답했으며, 43%는 “어느 정도” 신뢰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4분의 1 이상은 전혀 신뢰하지 않거나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놨다.
게다가 이슬람에서는 일반적으로 교리상 알라 이외의 존재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일은 금지된 행위로 여겨진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에서 이슬람교도가 가장 많은 국가로, 최근 들어 강경 이슬람 이데올로기도 세를 확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관련 준공식 기관인 ‘울레마 위원회(MUI)’는 선거 때마다 정당 후보자들에게 주술사를 찾아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촐릴 나피스 MUI 회장은 이번 선거 운동 기간 초반에도 X(구 ‘트위터’)에 “MUI는 2005년에 샤머니즘은 ‘하람(금지된 것)’이라고 명시한 파트와(이슬람 학자가 이슬람법에 대해 내놓는 의견)를 발표한 바 있다. 진(정령, 귀신)을 매개로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는 하람에 속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쿠수모는 자신이 아랍 및 이슬람 신화에 등장하는 정령(진)을 이용해 고객의 승리를 돕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멧돼지의 코에서 채취한 살아있는 벌레와 같은 부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후보자의 카리스마를 높일 수 있다면서, 고객들에게 이 같은 부적을 건네기도 한다고 한다.
이러한 부적 또한 이슬람에선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이다.
쿠스모는 자신이 20년 넘게 정치인 수십 명에게 조언을 해줬으며, 선거철이면 “인도네시아 전역의 후보자들”이 상담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속인을 찾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유권자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쿠스모는 “특히 재선을 노리는 (잘 알려진) 정치인들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새벽 2, 3시쯤 나를 찾아온다”면서 “마스크 등을 쓰고 온갖 종류의 위장을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쿠스모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의 이름을 밝히길 거부했다.
실제로 대부분 은밀히 주술사를 찾기에 정치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진 알기 어렵다.
배우로도 활동하는 쿠스모는 자신의 상담 비용이 얼마인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과거 자신이 소유한 큰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대한 사랑을 자랑스레 얘기한 바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싱크탱크 ‘파라마디나 종교 및 철학 센터’의 이슬람학자인 부디 무나와르 라흐만은 인도네시아엔 현지 신앙이 종종 종교적 가르침과 혼합돼 전통적인 주술 관습과 이슬람 신앙이 공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바인들의 정령 숭배, 힌두교-불교의 우주론, 주술 문화, 이슬람의 요소가 모두 융합한 신앙 체계인 ‘끄자웬’ 문화다.
‘끄자웬’이라는 용어는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섬이자,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인 자바섬에서 유래했다.
인도네시아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자바섬 출신으로, 이슬람교도였음에 끄자웬의 일부 요소를 따랐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정글에서 명상을 했으며, 그 후임자인 수하르토 대통령은 영혼을 정화하고자 강에서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코 위도도 현 대통령 또한 자바 달력상 자신에게 상서롭다고 여겨지는 날에 주요 정부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존경받는 이슬람 학자였던 압두라만 와히드 전 대통령 또한 다원주의적 신앙관의 소유자였으며, 늦은 밤 이슬람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라흐만은 일부 정치인들은 “이슬람 방식으로 주술적 기능을 행하는 주술사들”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온건 이슬람 정당 ‘파르따이 케방키탄 방사(PKB)’의 당원인 아마드 리파이는 동부 자바주 반유왕이 지역 선거에 출마했는데, 이슬람 지도자에게 자문을 구했음을 인정했다.
해당 지도자는 리파이에게 어떤 장소에서 어떤 기도문을 읊어야 하는지 등 자세한 지침을 줬다고 한다.
리파이는 “(지침에 따라) 알라스 푸르워에 가서 기도했다”고 말하며 살짝 웃었다.
알라스 푸르워는 일부 현지인들에게 정령이 사는 신성한 정글로 여겨지는 곳이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이 그랬듯 이곳의 숨겨진 동굴에 명상하러 오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리파이는 “난 이 우주에 인간 외의 존재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알라신의 모든 피조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파이는 선거 운동에서 영적인 도움과 현실적 전략 간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변호사인 그는 온라인에서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법, SNS 밈 등을 배우고, 선거구 및 유권자에 관해 공부하는 데 수개월의 시간과 상당한 돈을 투자했다고 한다.
전국적 소요 사태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권이 끝난 지 1년 후인 1999년, 인도네시아에선 첫 번째 민주 선거가 실시됐다.
점차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후보자들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매력적인 공적 페르소나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선 전통에서 현대로 완전히 넘어갔다기보단 혼재돼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게 라흐만의 설명이다.
라흐만은 “일부 정치인들은 “정치 컨설턴팅처럼 기능적이고 계산적인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더 확실한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강렬한 믿음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즉 자신이 선거에서 이기면 이는 영적인 존재 덕이라고 믿는 것이다.
한편 반유왕기 소재 ‘누산타라 주술사 협회’에 속한 주술사 압둘 파타는 의식을 치러도 선거에서 패한 정치인 고객들도 많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설령 실패했을 때도 이끌어주고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주장이다.
리파이 또한 영적 지도자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경쟁이 치열한 지방 선거를 치르며 내면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선거에서 질 준비가 돼 있냐는 질문에 리파이는 “당연하다. 진정한 싸움꾼이라면 이길 준비도, 질 준비도 돼 있어야 한다”면서 “만약 그럴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정치판에 뛰어들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 인도네시아: 화장실 청소로 선거 자금을 마련하는 후보 이야기
- '유명 교회 지도자'의 신도 강간 및 고문 정황, BBC 탐사보도팀 추적
- BBC 취재로 드러난 이슬람 ‘영적 치유사’의 성범죄 실태
Copyright ⓒ BBC News 코리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