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용어는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수준이에요."
한반도 분단 역사가 70년이 넘으면서 갈수록 남북의 언어 차이가 커지고 있으며, 특히 외래어가 많은 전문용어는 소통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변영수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위원은 밝혔다.
변 위원은 2008년부터 북한과 함께 공동 사전편찬 작업을 해왔다. 이를 위해 직접 평양과 금강산을 두 번씩 오갔고, 8차례 북한학자들과 직접 회의도 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공동사전편찬 회의도 2015년 이후로 중단됐다.
그는 “특정 단어가 북측에서 진짜 이 의미로 쓰이는지,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싶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교류는 9년째 중단됐지만, 그는 언젠가 다시 공동작업을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남북이 함께 사전을 만들기로 한 이유
겨레말큰사전은 남북한 언어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양측이 합의해 만들기 시작한 사전이다.
사전을 처음 제안한 건 통일 운동가 고 문익환 목사다. 문 목사는 1989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 언어 이질화 문제를 거론하며 공동 사전 편찬을 제안했고 김 주석이 이에 동의했다.
본격적인 논의는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어졌다. 2003년 남측이 북측에 다시 한 번 이 사전을 제안했고, 2004년 양측은 중국 연길에서 만나 사전편찬의향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첫 회의가 금강산에서 열렸다. 이때부터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총 25차례 회의가 진행됐다. 2008년 사업회에 합류한 변씨도 총 8번 참석했다.
“처음엔 평양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지, 만나도 될지, 북한 학자분들의 말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되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이런 걱정은 회의가 시작되자 금방 사라졌다.
“좋은 결과물을 내서 우리 국민들이, 혹은 우리 인민들이 이 사전을 쓸 수 있게끔 해야된다는 사명감이 양쪽에 동일하게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동료의식이나 유대감도 빨리 생기더라고요.”
한 번에 평균 7박 8일 정도 진행된 회의에선 어떤 단어를 실을지, 양쪽의 뜻은 어떻게 다른지, 사전에는 어떤 뜻풀이와 예시를 실을지 등을 활발히 논의했다.
“남에서만 쓰는 말, 북에서만 쓰는 말, 남북이 공동으로 쓰는 말, 그리고 남북이 서로 차이나게 쓰는 말, 이런 것들을 최대한 존중해서 사전에 잘 담아보자는 합의가 있었어요.”
양측은 이렇게 총 30만 7000단어를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후엔 일정 분량씩 나눠 남북이 각각 뜻풀이와 용례 등을 담은 원고를 미리 작성해오면, 이를 바탕으로 양쪽이 토론과 수정을 거쳐 합의된 원고를 만드는 식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활발하게 진행되던 연구는 2015년 25차 회의 후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중단됐다. 총 30만 7천 단어 중 약 40%인 12만여 단어까지 합의된 상태.
변씨는 “일시 중단인 줄 알았던 상태가 9년째 지속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나방’은 북한엔 없는 말, ‘식물인간’은 ‘백수’라는 뜻
분단 70년이 넘으면서 남북의 언어 차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지난 2016년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을 비교한 결과 일상어의 38%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들에겐 외래어 차이가 가장 익숙하다. 영어의 ‘juice’를 한국에선 ‘주스’, 북한에선 ‘과일단물’로 부르는 것처럼 한국식 외래어, 북한식 순화어가 가장 널리 알려진 차이다. 변씨는 "외래어가 들어온 경로, 표기하는 규칙 등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양쪽의 말이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데 같은 우리말을 양쪽이 다른 뜻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변씨는 외래어도 아니고, 체제와 관련된 말도 아닌 순우리말이나 오래된 한자어임에도 양쪽에서 다르게 쓰는 말이 생각보다 많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나비’라 부르고 , ‘나방’이란 말은 사전에 있지도 않아요. 또 북에서 ‘식물인간’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을 빗대 이르는 말로 ‘백수’와 유사한 뜻으로 써요.”
‘오징어’와 ‘낙지’를 남북에서 서로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18년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오징어, 낙지부터 통일해야겠네요”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는 전문어 영역
사실 변씨가 더 우려하는 건 이런 일상어보다 전문용어 영역이다.
“탈북민이 우리나라에서 교육받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학습 용어가 다른 거예요. 문법 용어, 미술 용어 이런 것들이 아예 다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이런 건 진짜 큰 문제가 되는 거죠.”
남북의 전문용어는 일상어에서보다 큰 차이를 보인다. 앞선 2016년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의 조사에서 남과 북의 일상어가 약 38%가 달랐던 반면, 전문어는 약 66%가 달랐다. 전문어 10개 중 3개만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특히 분단 이후 양쪽이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거나 발전시킨 학문, 산업, 기술 관련 용어 차이는 상당하다. 예를 들면 곤충을 분류하는 412개 과 중에서 316개 과의 이름이 다를 정도다.
“일상에서 쓰는 말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전문용어는 그렇지 않아요. 전문 영역에서 일을 같이 해야 되는데 서로 쓰는 단어가 달라서 아예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고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남북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때는 양쪽의 말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할 기회가 많았다. 또 함께 작업을 진행하게 위해 양쪽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할 수 있었다.
일례로 한국표준협회는 지난 2007년 ‘남북 산업용어 비교집’을 만들어 개성공단 남북 직원들에게 배표했다. ‘타이어’를 북한에선 ‘다이야’로 적는 등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 통하지 않자, 약 6000개 용어의 비교집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개성공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간교류가 끊긴 현재엔 무엇이 다른지 확인하기도 어려워졌다.
이제는 문서로만 볼 수 있는 서로의 차이
변씨는 함께 연구했던 북한 학자들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도 털어놨다. 그가 북한측 학자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연구 목적으로 유입되는 북한 문헌이 유일하다.
“북한 자료센터를 통해서 들어오는 책들을 보면 가끔 연세 드신 선생님의 성함이 그 책에 저자로 나와있는 거예요. 책을 쓰실 정도로 아직은 건강하시다는 걸 확인하는 거죠.”
변씨는 그럴 때마다 분단을 새롭게 체감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인사를 하고 싶고 안부를 묻고 싶은데, 그런 걸 할 수 없을 때 분단이 현실이구나 느끼는 거죠.”
연구도 문헌에 의존해 하고 있다. 책이나 기사 등 북한 문헌을 통해 언어 차이를 계속 연구하고, 중단된 회의가 재개될 것을 대비해 미리 원고 가제본도 만들어놨다.
그러나 아쉬움은 적지 않다.
“특정 단어가 북측에서 진짜 이 의미로 쓰이는지,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싶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변씨는 또 2015년 이후 회의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됐다면 “이미 사전 하나가 완성됐을 것”이라며, 이 사전이 완성됐다면 “전문용어 조사나 북한의 지역 방언 조사도 훨씬 활발하게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굉장히 아쉽다”고 말했다.
회의가 재개될 날만을 기다리던 변씨에게 최근 또 한 번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북한이 최근 남북 민간 교류 사업을 중단하면서 북한에서 사전 편찬을 담당하던 민족화해협의회를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변씨는 완절한 단절이라고 답했다.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서도 정신세계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이제 (남북이)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가지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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