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세] "작업의 원천은 분노"···종이 조각가 신민, 여성·노동자에 건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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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세] "작업의 원천은 분노"···종이 조각가 신민, 여성·노동자에 건네는 위로

여성경제신문 2024-01-07 12: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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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경제신문이 연재하는 [청년이 보는 세상(청세)] 이번 편은 고려대 '탐사기획보도' 수업 수강생들이 작성한 기사입니다. 여성경제신문은 이 수업을 지도하는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와 수강생들의 동의하에 기사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두꺼운 눈썹은 산처럼 치켜 올라가 있고, 눈동자는 흰자를 빠져나올 정도로 부릅떠 있다. 가로로 길게 난 입은 고르지 않은 치아를 잔뜩 보이며 소리치고 있고, 코에는 주근깨가 촘촘히 박혀있다. 마구 그어진 직선의 머리카락과 크레용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엉성하게 칠한 표면에서는 날카로움이 보인다. 거칠지만 부드럽고 불안하지만 단단한 종이 위에 다양하게 표현된 작품은 작가 신민 씨(39)의 종이조각이다.

춘천 작업실 개방 날, 작가 신민 /김하영
춘천 작업실 개방 날, 작가 신민 /김하영

작가 신민은 점토로 원형을 만들고 그 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10겹 이상 붙인 뒤, 연필로 스케치하고 크레용으로 색칠한다. 강하고 오래가는 금속 대신 쉽게 찢어지는 종이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종이는 언제든 변형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 불안함에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신민은 대답했다. 단단한 금속 조각은 오래도록 변형이 없지만 약한 종이 조각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작가는 시간이 지나며 종이가 닳고 변형되는 모습에서 불안함과 동시에 생명력을 느꼈다.

살아있는 종이 위에는 분노를 그렸다. 작업의 원천을 '분노'라 답한 작가는 연필심을 힘주어 눌러 빠른 속도로 선을 그으며 분노를 표출하고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분노의 대상은 주로 사회의 부조리함이다. 그중에서도 신민은 여성과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한다.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2014)'은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된 맥도날드 시리즈 중 하나로, 작가가 직접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몰래 모은 맥도날드 감자포대를 사용했다.

감자포대에는 'MAC FRIES', 'FRENCH FRIED POTATOES'와 원산지 표기까지 잡다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점토로 개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만들고, 그 위에 감자포대를 덮고, 포대 위에 연필로 맥도날드 유니폼을 그렸다.

둥근 카라가 달린 흰 셔츠와 붉은색 리본, 청색 바지는 당시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의 유니폼을 그대로 재현했다. 작가는 "가난의 허물을 벗어 가난을 재현하는 재료로 사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맥도날드는 감자튀김을 싼값으로 팔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주고, 낮은 임금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노동자들은 결국 저렴한 감자튀김을 사 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감자튀김이 가난의 악순환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고, 그 허물인 감자포대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 /신민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 /신민

다음으로 신민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머리망이었다.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그물망으로 감싼 뒤 검은색 새틴 리본으로 마무리하는 머리망은 한국의 서비스직을 대표하는 소품이다.

작가의 작품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연대한다(2022)'에서 종이조각은 검은색 리본 머리망을 하고 있다. 이는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자세히 보면 보통의 서비스 노동자와는 조금 다르다.

화난 듯 올라간 두꺼운 눈썹과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강한 눈빛은 서비스직에 요구되는 순종적이고 여성적인 모습이 아니다. 작가는 서비스 노동자에게 강요되는 웃음과 친절한 모습이 아닌 분노하는 모습으로 그들을 나타냄으로써 자신이 노동자와 함께 분노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해당 작품을 본 춘천문화재단의 박서령 씨(25)는 "'웃지 않아도 괜찮아, 화내도 돼'라는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연대한다(2022)' /신민
'우리의 기도-나는 동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껴안는다 나는 연대한다(2022)' /신민

신민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위로를 주고 싶습니다." 작가는 예술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미술관이 열리는 시간에 일터에 있어야 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어디서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그림 쪽지 시리즈를 제작했다. 새벽까지 전시장을 개방했고, 딱딱한 미술관뿐만 아니라 성당, 도서관 등 다양한 장소에 작품을 전시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10월 6일 역시 춘천에 위치한 작업실을 공개해 누구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오픈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작가의 대학생 멘티 고홍기 씨(24)는 "종이만을 이용해서 큰 조형물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하는 게 대단하다"라고 말했다.

"제 작품, 글자를 몰라도 사람들을 느끼게 하는 재주가 저는 있습니다." 신민 작가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존재를 자세히 보고 작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덕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종이, 감자포대, 머리망까지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소재를 활용하여 위로를 전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제 제빙기와 관련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다. 그는 "얼음은 일터에서 금과 같지만, 빠르게 사라집니다. 마치 신기루 같아요"라고 말했다. 얼음이 없는 음료는 상품 가치가 없기 때문에 얼음은 높은 가치를 갖고, 빠르게 녹는다는 점에서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그런 얼음을 쏟아내는 제빙기가 화폐를 찍어내는 기계 같다는 신민 작가는 오늘도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 벽면을 메모지로 빼곡하게 채운다.

김하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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