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를 키우는 디자이너, 나건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파이를 키우는 디자이너, 나건

독서신문 2024-01-05 06:00:00 신고

“여기 이렇게 있으면 제가 홍대 미대 나온 줄 알아요. 이렇게 온 건 제가 첫 번째입니다.”

나건 교수는 지난해 12월 28일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연구실 책상 너머에 앉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흔히 말해 홍대 미대 루트를 탄 ‘성골’은 아니다. 한양대에서 산업공학을(학사), KAIST에서 산업공학을(석사), 미국 터프츠대에서 엔지니어링디자인학을(박사) 전공한 공학도다.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나건 교수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나건 교수

이 중에서도 나건 교수의 전문 분야는 인간공학이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학문, 인간공학이란 무엇일까?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답게 한 번에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다.

“좋은 디자인이란 보기 좋고, 사용하기 좋은 디자인이잖아요. 쉽게 말해 보기 좋고, 사용하기 좋게 하는 학문을 인간공학이라고 해요. 제가 인간공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가 1979~80년도인데, 우리나라에 인간공학 교수가 없었어요. 전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스터디하면서 독학했죠. 공부하다 보니 이게 다 인간 심리에 대한 이야기인 거예요. 그때 인간의 심리를 잘 이용해 보기 좋고, 사용하기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나건 교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는다. 실제로 그의 휴대폰 갤러리엔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각양각색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비가 온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지 손에 들고 다니는지 하나하나 관심 있게 봐요. 다른 사람 집에 가면 가장 먼저 가는 데는 화장실이에요. 평상시에는 못 보는 곳이잖아요. 또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승객들이 어느 자리부터 앉기 시작하는지 이런 것도 보고요. 다 일정한 패턴이 있거든요. 이렇게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관찰하는 것이 재밌어요.”

나건 교수가 직접 촬영한 사진
나건 교수가 직접 촬영한 사진

나건 교수는 한국에 몇 안 되는 공학도 출신의 디자인 교수이자 국내에서 가장 바쁜 디자이너로도 통한다. 53만 명이 다녀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해 10월에는 부산시 총괄 디자이너로 위촉됐다.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 서울 2010’ 총감독을 지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커리어다. 이렇게 ‘열일’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파이를 키워야지요.”

“공학하는 사람들은 파이를 키우는 것에 익숙해요. 예를 들어 정부가 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하면, 우선 뜻을 합해 자신의 분야에 떨어지는 예산을 높이려고 하죠. 서로 경쟁하는 건 그다음이에요. 그래서 공학도들의 파이는 갈수록 커지는데, 여기 와서 보니 디자이너들은 파이를 키우는 것에 취약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나건 교수는 파이를 키우기 위해 어떤 전략을 쓰고 있을까? 디자이너는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긴말 없이,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디자인의 본질이다’ 하고. 그는 총감독을 맡은 ‘제10회 광주 비엔날레’를 ‘테크놀로지-라이프 스타일-컬처-비즈니스’ 4개의 테마로 구성했다.

“예술과 디자인의 가장 큰 차별점은 진화입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썼던 휴대폰을 쭉 늘어놓으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제품이 점점 개선되는 게 한눈에 보이잖아요. 디자인도 그에 따라 바뀌며 진화하죠.”

디자인과 기술이 만나 라이프 스타일과 접목되고, K-컬처로 전 세계와 이어져 궁극적으로 비즈니스로 귀결된다는 흐름의 스토리를 담았다.

“또 하나의 차이는 예술은 작가 관점이지만, 디자인은 고객 관점이라는 거예요. 철저히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의 입장에서 디자인하죠. 고객이 사도록 만들어야 하니까요. 디자인을 잘하면 고객이 좋아하고, 고객이 좋아하면 결국 기업이 잘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디자인의 종착점은 비즈니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1년간의 유학 경험을 통해 얻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살려 세계 각지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 또한 디자인계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해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3회 세계디자인총회’에서 세계디자인기구(World Design Organization, WDO) 이사로 선출됐다. WDO는 1957년 설립된 후 현재 35개국 212개 회원기관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최고의 디자인 국제기구다. 또한 12년째 독일 에센에서 열리는 레드닷 어워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다. 레드닷 어워드는 iF 어워드, IDEA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힌다.

“해외 인사뿐만 아니라 기업 오너들에게도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얘기해요. 오너들이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디자이너를 한 명이라도 더 뽑을 테니까요.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많이 하고요. 그래서 정부 기관에서 주최하는 강의에도 웬만해선 참석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이런 활동들이 모여 알게 모르게 디자인 파이가 서서히 커지는 거죠.”

그런데 이 파이는 자신 몫이 아닌 제자 그리고 후배 디자이너 몫의 파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이를 크게 가져오겠다는 의지는 선배 디자이너로서의 책임감에서 비롯됐다.

“제가 처음 디자인계에 발을 들였을 때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어요. 은퇴할 때까지 디자인계의 파이를 한 100배쯤 키우겠다고요. 어쨌든, 교수로 20년 이상을 지냈으면 학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활동하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독서신문 한주희 기자]

Copyright ⓒ 독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