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김주현 기자] “긴 시대에 걸쳐 다양한 수정 방식으로 생존해온 식물은 어느 누구보다 치열한 투쟁을 겪어왔다. 말하지 못하고 이동할 수 없을 뿐, 생존 욕망을 품고 살아남은 그들은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한 존재가 아닐까. 분명 신비롭고 복잡한 생명체다. 각양각색의 감정과 욕망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사회 속 우리는 식물과 흡사하게 고요히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나는 여기, 식물과 인간 사이 유사한 지점에 몰두한다. 독특하고 기이하게 생긴 식물은 내 주관이 개입되며 검센 생명력을 상기시키는데, 이러한 시각적 심상은 그들을 표현하는 작업의 원동력이다.” (함수지 작가 작업노트 中)
지난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함수지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현재 두실갤러리에서 개인전 ‘모조식물(Imitation plant)’로 관객을 만나고 있는 그는 식물을 소재로 한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예고에 진학하며 미술을 선택했다. 디자인을 염두에 두었다가 동양화의 색감에 매료되어 대학교, 대학원까지 동양화를 공부했다. “잔잔하게 쌓아온 결과물을 보여주는 방식이 잘 맞았다”며.
이번 전시 역시 한옥 분위기를 풍기는 두실갤러리와 잘 어울리는 작업을 내보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갤러리에 여러 차례 방문하며 동양화 작업이 잘 녹아들 수 있게 준비했다. 이 지점이 이번 개인전의 포인트다.
그는 식물과 인간의 유사성에 집중한다. 올 상반기에 진행한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가까운 사람의 말로 상처받은 경험을 식물의 가시털에 비유해서 풀어냈다.” 부드럽고도 뾰족한, 만지면 부드럽거나 혹은 따가운 식물의 털을 함수지만의 방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식물의 외형에서 비롯된 제 느낌, 거기서부터 착안한 가상의 식물을 계속 창조했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식물을 보고 그리긴 했어도 그대로 모방한 게 아니라 모방의 재현을 깨부수는 시도를 했거든요. 현실에 존재하되 제 심상이 투영됐기 때문에 모조식물이란 단어가 나온 거예요. 유약하고 연약한 듯한 식물이 결국 이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명력이 인간과 참 비슷해요. ‘검센 생명력’이죠.”
사전은 ‘검세다’란 단어를 ‘성질이 질기고 억세다’라고 설명한다. 함수지도 ‘검센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 현재진행형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싶어요.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도 이거예요. ‘타임리스(timeless)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커요. 교수님께선 ‘대체 불가능한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면 내가 없어도 되니까요. 식물이 주요한 소재이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환경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야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와 연결지점을 찾는 거죠. 뉴스도 보고, 친구들의 이야기도 듣고요.”
“결국 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저를 둘러싼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작업 초기에는 물리적인 환경, 예를 들어 집(자취방)이나 학교에서 느꼈던 대인관계를 공간의 특성과 결부시켰어요.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 건넛방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면, 그 창문이란 매개가 감시 장치처럼 여겨지더라고요. 그걸 녹여낸 거죠. 이젠 제 감정을 먼저 느끼고 겪었던 일을 떠올리게 됐어요. (작업 방식이) 약간 바뀐 거죠. 그 대상이 자연물이 된 이유도, 인간과 자연이 닮아있기 때문이에요.”
‘작가 함수지’를 만드는 주변 환경, 그리고 작가 함수지로 살아가기 위한 ‘인간 함수지’의 뒷받침. 떼려야 뗄 수 없는 페르소나는 결국 작업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업에 따라 기분이 정점을 찍었다가 땅을 찍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회복이 된다. “전시를 여는 게 제 내적 동력이에요. 전시를 위해 에너지를 잔뜩 끌어다 쓰고, 또 전시를 열면 어느 정도 차분해지는… 물론 작업하다 보면 제가 한없이 나약한 존재 같고, ‘그림한테 졌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제 그림에 다양한 견해를 나눠주시는 분들을 보면 금세 회복돼요.”
본인에게 당근보다 채찍을 주는 편이지만, 그 균형을 잡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아주 주관적인 일이다 보니 누구는 좋다 하고 누구는 싫다 해요. 취향의 문제이지만, 작가가 참 이중적인 게 크리틱(critic)을 듣고 싶었더라도 막상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웃음) 하지만 쓴소리를 들어야 작업이 나아진다고 믿어요. 좋은 재료나 드로잉북 같은 ‘셀프 선물’을 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죠. 제 휴대폰에는 하트 폴더가 있는데, 그곳엔 제게 보내주신 응원 메시지가 저장되어 있어요. 제 작품을 제가 아껴주지 않으면 누가 아껴주겠어요. 하하”
인터뷰 내내 미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그는 조금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작가 함수지’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은 게 올해 상반기다. 5월 청년미술상점을 시작으로 단체전과 개인전을 열며 바쁜 나날을 보냈더니 벌써 하반기란다. 하나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생기고, 논문도 준비하며 뜻 깊은 2023년을 만들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사실 이런 삶을 원했어요. 전시가 계속 잡히기를 바랐어요. 근데 이게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어서 무섭더라고요. 내 이야기를 단단히 구축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투박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고민이 생겼어요. 근데 또 욕심도 나고… 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작년의 너는 이런 삶을 원했는데, 지금의 너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깨달았어요. ‘나는 왜 즐기지 못하지?’… 그때부터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마인드를 장착해서 지금은 아주 재밌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도 전시가 예정되어 있거든요.”
마지막으로 그는 “다양한 시리즈의 작업물을 이어와도 나만의 색이 뚜렷한 작가가 되고 싶다. 사실 지금 시작도 못한 것 같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나. 할머니가 되었을 때 성공해도 참 좋을 것 같다”면서 “보통 40대에는 정점을 찍으시는 것 같다. 저도 욕심을 내보자면 40대엔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전시했을 때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작업을 증오할 때도 있지만(웃음) 저는 작업을 너무 사랑해요. 꾸준히, 작업에 몰두할 거니까 제 작품을 보고 많은 걸 느끼시길 바라요. 제 작업물이 관객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랍니다.”
[작가 이력]
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 전공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과 석사과정 재학
[개인전]
2023 모조식물(Imitation plant), 두실갤러리, 서울
2023 부드럽고 뾰족한 것(Soft, pointed), Tya 갤러리, 서울
[단체전 등]
2023 갈림길 앞에서 춤을 추다, 갤러리 강호, 서울
2023 위플래시!(Weflash!),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23 엔데믹(Endemic), 갤러리메르헨, 대전
2023 앤솔로지(Anthology),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
2023 청년미술상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20 제13회 아시아프 (ASYAFF),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수상]
2019 길상 동양화 공모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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