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김보선 기자] '이균용 낙마'로 대법원장 후보자를 '원점 재검토' 중인 윤석열 대통령의 고심이 깊어졌다.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 기각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대여 투쟁 강도를 높이는 상황에서 야당 주도로 대법원장 인준안이 부결된 만큼, 무엇보다 야당이 결코 반대할 수 없는 새 후보자를 내세워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사법부 공백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정국에도 치명타인 만큼 새 후보자를 속도감 있게 지명하는 동시에, 야당에 협치의 손을 먼저 내미는 등 윤 대통령의 '정치력' 발휘가 필요한 때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것은 노태우 정부 당시인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이후 35년 만이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이유를 두고 여러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헌법상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만큼 윤 대통령 역시 책임론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불통 정부 이미지 벗어야…영수회담 수용이 지름길"
10일 <아이뉴스24> 취재로 과거 청와대에서 근무한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특히 대법원장 임명 건은 국가의 사법기능과 직결되기 때문에 청와대와 여야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진행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여야가 여러 정치적 현안으로 정쟁과 반목을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큰 무리 없이 대법원장 임명이 절차대로 진행됐던 것은 청와대를 비롯한 여야의 정치력이 그 간극을 메워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뉴스24>
이 때문에 인사와 관련해 지금까지 윤 대통령이 보여왔던 강경책은 '대법원장 공백 사태'에 따른 '사법 공백 장기화'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이 사태의 대표적인 해결 방안으로 윤 대통령이 민생회담을 제안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물꼬를 터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래서 나온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는 통화에서 "지난 1년 반 동안 대통령이 취임 이후 야당 대표를 아예 상대해 주지 않고 있는데 이런 불통 정부는 처음 본다"며 "대통령과 여야 대화가 단절되니 이번과 같은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교수는 "검사가 아닌 대통령으로서 판결 전 야당 대표를 범법자로 보다시피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대국적 정치를 위해 차제에 이재명 대표와 만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이 대화 복원의 지름길이 되고 여러모로 좋으리라 본다"고 제언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의 김한규 민주당 의원은 "국회 동의 대상자에 대한 인사의 경우 야당과 비공식적으로 협의해 후보자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었다"며 "1차적으로 부결돼 새 후보를 추천하거나, 사전에 야당의 반대가 충분히 예상되는 경우, 또는 정권 말기에 특히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국회에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은 사전에 그런 조율이 이뤄졌거나, 아니면 정부여당이 다수당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의원은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에 있어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었음에도 야당과 협의가 없었던 것은 '정치 실종'"이라고 평가했다.
전직 청와대 비서관 출신의 또 다른 인사는 "이제부터는 대통령이 진솔하게 설득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삼권분립 국가에서 사법부 수장에 대한 임명인 만큼 야당과의 불통을 이번 국면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민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나" 책임론
반면, 이 후보자의 경우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하에서도 대법관 후보로 올랐던 만큼 야당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낙마시켰다는 비판도 거세다. 이 때문에 야당도 대승적 차원에서 대법원장 임명 문제만큼은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전향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야당이 '이재명 영장기각'에 이어 대법원장 후보자까지 낙마시키면서 정국 주도권의 드라이브를 걸거나 이재명 대표의 '재판 리스크'를 핸들링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여타 장관이나 정무직이 아닌 사법부 수장 임명 문제만큼은 한발 물러날 수 있는 정치적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대한변호사협회 수석대변인 출신인 최진녕 변호사는 통화에서 이 후보자가 문재인 정부에서 세 차례 대법관 후보로 천거됐다는 점을 들어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느냐"며 야당을 직격했다. 그는 "대법관 인사청문회도 아닌, 대법원장 임명은 그 무게가 엄청난 것"이라며 "형식적으로는 이 후보자 부결이지만, 정치적 맥락에서 보면 사실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고 사법부 탄핵"이라고 해석했다.
국민의힘 비전전략실장을 지낸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행 (여가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고 여론이 자기편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민주당이 오버했다"라며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당론 채택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근육질을 자랑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크게 결격 사유가 없는 이 후보자를 부결시킴으로써 허들을 높여놨기 때문에 제2, 제3의 후보를 가결시킨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말을 바꾸는 꼴"이라면서 야당의 협조 가능성을 낮게 예측했다.
◇"야당도 거부할 수 없는 중립적 인물 찾아야"
그러나 윤 대통령이 집권 이후 지금까지 고수했던 인사 스타일을 쉽게 바꾸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이 때문에 '초유의 사법공백 장기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야당이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을 지명하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윤 대통령과 여야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영수회담 등을 통해 드라마틱한 해결을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황도수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는 "(이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윤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보다 중도적인 인물, 야당도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황 교수는 "국민이 사법부를 못 믿겠다는 핵심적 이유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결 때문"이라며 "정부권력이나 정치 눈치를 보지 않고 국민의 신뢰만 생각하는 대법원장을 임명하는 것이 이 사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법조계 한 유력인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굳이 따지자면 대통령의 추천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야당도 중립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인사를 빨리 추천해야 한다"면서 "4월 총선 결과를 보고 임명하자, 그럴 건 아니다. 잘못하면 국가 시스템이 마비된다"고 경고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윤 대통령이 야당과의 협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같은 의견을 내놨다. 다만 "야당이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연속적으로 부결시키는 것은 국정발목을 잡는다는 역풍에 맞기 쉽다. 윤 대통령이 이 가능성을 보고 '내 스타일로 인선하겠다'라고 나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대통령실은 야당을 향해 "국민 권리를 인질로 잡은 정치 투쟁", "대단히 유감"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는 최선의 대법원장 후보를 찾아 국회에 임명동의를 제출한 만큼, 제로베이스에서 인선을 검토 중이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사법부 공백을 메우고 국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적임자를 찾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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