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노규민 기자] "배우로서 고여 있지는 않나. 안일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늘 경계하는 부분입니다."
지난여름 성수기 '비공식작전'에 이어 추석 연휴 '1947 보스톤'으로 극장 관객을 만나는 배우 하정우가 이렇게 말했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하정우를 만났다. 영화 '1947 보스톤'과 관련한 에피소드 외에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1947 보스톤'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들의 도전과 가슴 벅찬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손기정 감독과 서윤복, 남승룡 선수의 실화를 담았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하정우, 임시완, 배성우 등이 열연했다.
하정우는 시나리오를 읽기 전부터 '강제규 감독'만 보고 이미 출연을 결정했다. 그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첫발을 내디딘 작품 '쉬리'를 군복무 당시 휴가 때 관람했다. 정말 놀라웠고 반가웠고 멋졌다"라며 강 감독 영화를 처음 접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하정우는 "배우를 꿈꾸는 학생 신분일 때 압구정 고깃집에서 강제규 감독님을 본 적이 있다. 옆 테이블에서 연출부를 데리고 열띤 토론을 하시더라. 그걸 지켜보면서 '나도 저 판에 껴서 영화배우로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다"고 말했다.
또한 하정우는 "우연한 기회로 사석에서 강 감독님을 만났다. 이후 감독님 집에 놀러 가고 그러면서 형 동생 사이까지 됐다"라며 "자연스럽게 마라톤 영화를 하게 됐다면서 제안을 주셨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감독님과 함께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앞섰다"고 했다.
하정우는 "사실 소재가 '마라톤'이라고 했을 때는 '어? 지루한 영화 아닐까' 싶었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나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일단 단순한 마라톤 영화가 아니어서 좋았다"라며 "'보스톤 대회'에서 그렇게 어렵게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는지 몰랐다. 출전 자체가 쉽지 았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에 스스로 놀랐다. 지금까지 손기정 선생님이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는 단면적인 것만 알았다. 손기정 선생님이 서윤복 선생님을 이끌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된 여정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고,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좋겠다고 바랐다"고 말했다.
극 중 하정우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1947년 보스턴의 기적을 이끄는 '손기정' 감독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발산한다.
그는 "고증을 통해 준비된 옷을 기꺼이 입은 것밖에 없다"라며 "손기정 선생님과 저희 할아버지 고향이 비슷하다. 살펴보니 젊은 시절 손기정 선수의 기질이 저희 큰아버지와 닮으셨더라. 서윤복 선수를 다그치고, 이끌고 결국 보스톤까지 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이 공감되고 이해됐다"고 했다.
하정우는 서윤복이 뛸 때 자전거를 타고 함께 함께 달린 장면과 관련해 비화를 전했다. 그는 "2019년 상반기 영화 '백두산'을 촬영하다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끝나자마자 양쪽 무릎을 수술하고 재활하면서 '1947 보스톤' 촬영을 병행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으로 대체 했고, 나중엔 회복돼서 뛰는 장면을 후반부에 찍었다"고 설명했다.
하정우는 데뷔 전부터 꿈꾸던 '강제규 감독'과 작업한 소감도 이야기했다. 하정우 역시 꾸준히 연출하고 있는 배우 겸 감독으로서, 강 감독의 모습을 가볍게 바라보진 않았다.
그는 "강 감독님은 소통을 정말 잘 하신다. 혼자만의 세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많은 의견을 문턱 없이 잘 받아주시더라"라며 "촬영을 하다 보면 감독으로서 고집을 부리는 상황이 많이 생기는데 그런 부분에서 유연하게 끌고 가셨다. 사실 시나리오부터 연출까지 영화를 담아내는 기술은 감독 각자가 훌륭하다. 능력은 고유의 영역이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소통하는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정우는 마라토너 '서윤복' 그 자체가 돼 열연한 임시완에 대해서도 얘기 했다. 그는 "시완이는 5차원이다. 진짜 희한한 구석이 있다. 처음에 봤을 때부터 저랑 생활방식부터 달랐다. 그래서 어쩌면 손기정-서윤복 선생님과 같은 케미가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손기정 선생님도 처음엔 서윤복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나"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하정우는 "시완이를 처음 알고 난 이후부터 알아가는 과정이 손기정 선생님이 서윤복 선생님을 알아가는 과정과 흡사했다. 손기정 선생님이 서윤복 선생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저 또한 임시완이 가진 5차원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하정우는 "'1947 보스톤' 촬영 전에 고사를 지냈다. 주연배우들이 나와서 한마디씩 하는데, 임시완이 갑자기 제자리 뛰기를 하더라. '이건 뭐지? 왜 이러지?' 싶었다. 그러더니 "계속 달리는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클래식한 멘트를 날리더라. 그게 '본심'이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게 임시완의 매력이고 큰 힘이구나 느꼈다"라며 "무엇보다 임시완은 '서윤복'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무모할 수 있는 식단, 운동을 병행하면서 물리적인 노력을 다했다. 뛰는 장면부터 눈빛 하나까지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그대로 담겼다"고 칭찬했다.
또 하정우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 것과 관련해 '부담'감도 털어놨다. 그는 "'수리남' 때 실제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며 신기해하셨다. 어쨌든 '수리남'은 영화적으로 재구성이 많이 됐다. 최근 '비공식작전'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재해석 했기 때문에 사실상 허구의 인물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인물이라 굉장히 조심스러웠다"라며 "촬영을 마친 이후에도 손기정 선생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분의 성향 같은 걸 함부로 이야기하면 그 인물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에서도 상당히 할 이야기가 없다. 차라리 왜 '비공식작전'이 100만밖에 동원 못 했는지 이야기 하는게 쉽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말이 나온 김에 하정우는 전작의 '실패'에 대해 덧붙여 말했다. 그는 "'비공식작전'은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었다. 재미있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철저하게 검열해볼 필요가 있다. 솔직히 상처나 아픔이 아물진 않았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고 느낀다. 시대의 흐름, 콘텐츠를 소비하는 정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형태 등을 모두 살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1947 보스톤'이 개봉하고, 추석 시즌이 지나면서 구체적인 깨달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특히 하정우는 "내가 고여 있지는 않나. 안일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어떻게 하면 발전해 나갈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비스트 보이즈'와 '멋진 하루'를 찍었을 당시 연기가 너무 똑같다고 스스로 느꼈다. 다음부터는 앞니라도 하나 뽑고 연기할까 라는 생각까지 했다. 어떻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지,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늘 고민하고 경계한다"라고 말했다.
하정우는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계속해서 배우로 일하는 이유는 '영화'를 좋아해서다. 어렸을 때 영화를 틀어놓고 잠드는 일이 하루 일과의 끝이었다. 잠이 안 오면 반복해서 계속 봤다. 과거 비디오테이프, DVD 등을 다 모았다. 그리고 영화 '대부'를 통해 인생사와 인간관계를 배웠다"라며 "지난 20년을 돌아봤을 때 영화 현장에서 정말 많은 걸 깨달았다. 또 많은 친구가 생겼다. 저는 영화가 좋다. 찍는 것, 찍히는 것 모두 다 좋다. 영화 가지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좋다"며 미소 지었다.
추석연휴 '1947 보스톤'은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거미집' 등 쟁쟁한 한국영화와 같은 날 개봉해 경쟁을 펼치게 됐다. 하정우는 "마라톤 장면이 상당히 스릴있게 찍혔다. 관람을 넘어서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라며 "무엇보다 깊이 있는 드라마가 우리 영화가 가진 힘이다. 국뽕이다 신파다 치부할 수 있지만, 태극기를 어떻게 달고 그런 큰 대회에서 우승했는지 알아야 하지 않나. 아무리 빨리 감기로 보는 시대가 됐다고 하지만, 보스톤 대회의 의미와 뒷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소신있게 말했다.
뉴스컬처 노규민 presskm@knewscor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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