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 서울 <스트리밍 타임> 전시장 전경.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특히 도시의 시간은 거센 물살처럼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 인간이 잠든 사이에도 재생되는 영상과 음악은 현대사회의 시간을 장악하고, 물줄기가 흐르는 모양을 가리키는 ‘스트리밍’은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현상이 되었다. 모든 것이 빠른 도시 서울에서 ‘스트리밍’은 활발하게 이뤄진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이 점에 주목했다. 프리즈와 협력한 브레게의 2023년 아트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그는 프리즈가 열리는 4개 도시를 테마로 각 전시를 기획했다. 브레게의 워치메이킹과 프리즈의 연결점으로 도시의 시간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지난 5월 프리즈 뉴욕의 <오비탈 타임(Orbital Time)>에 이어지는 서울의 전시는 <스트리밍 타임(Streaming Time)>이다. 전시 기획자인 심소미 큐레이터와 이번 전시를 통해 신작을 공개한 안성석, 정희민 작가에게 서울의 시간에 대해 물었다.
벽을 가득 채운 안성석 작가의 디지털 사진 작업 ‘마지막 접속 시간’과 영상 ‘꺼지지 않은 알람 소리’.
브레게 부스에서 두 작가의 작품과 브레게의 시계, 워치메이킹 장치 등을 함께 볼 수 있었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했나?
심소미 (이하 심) 공간 구성은 나의 제안을 바탕으로 브레게 및 프리즈 팀과 무수한 대화를 거치며 발전되었다.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은 ‘브레게와 예술 작품 사이에서 시간적 관계망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였다. 브레게의 400년 역사는 시계의 역사를 망라한다. 그렇기에 전시 주제를 동시대뿐 아니라 넓은 맥락에서 파악하여 전체 구성에 녹이고자 했다. 안쪽 벽면에는 안성석 작가의 디지털 사진과 영상 작업을 배치했다. 정희민 작가의 회화는 공간 가운데 독립적으로 자리한 벽에 걸었는데, 작품이 유동적인 시간 속에서 주체적으로 변화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주변에는 브레게의 역사적 시계와 현대 모델, 그리고 기요셰 장인과 워치메이커를 배치했다. 광속으로 달리는 시간의 흐름을 이들이 안정적으로 지탱한다는 구성이다. 현대적 시간의 급진성과 역사적 시간의 견고함이 서로를 지지하면서 유기적 흐름을 형성하도록 의도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젊은 작가 2인을 소개했다. 발탁의 배경이 궁금하다.
심 디지털 문화가 발전하며 예술의 형식과 주제, 물성 등 많은 측면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관심사 아래 두 예술가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정희민 작가는 회화의 물질적인 조건과 관습을 전복하는 실험을 도전적으로 지속해왔다. 안성석 작가는 첨단 디지털 기술을 다루면서 이를 하나의 기억 장치로 제시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두 작가는 각각 전통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다루기에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디지털과 현실, 신체와 이미지, 물질과 비물질, 개인과 집단의 간극을 파고들어 관계망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스트리밍 타임>을 구상할 때 동시대의 시간을 급진적인 시각성으로 제시하는 두 작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정희민 작가는 ‘부서진 배 위의 세이렌 아네모이아’ 연작으로 시간이 몸을 통과한 뒤 남는 것을 표현했다.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발전시켰나?
정희민 (이하 정) 최근 작업에는 닿고자 하는 물질의 상태를 가리키는 제목을 붙일 때가 많다. ‘세이렌 아네모이아’는 프랑스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의 시에 등장하는 ‘세이렌-아네모네’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변용한 것이다. 이는 세이렌과 아네모네가 결합한 혼성적 존재로, 시인은 자연물과 인물이 통합된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세이렌의 몸을 질감, 소리, 빛 등 이질적 요소가 중첩된 추상적 형태로 표현했다. 산산조각 난, 실체가 없고 잡히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매혹적인 이미지의 몸을 상상하며 작업했다.
1 브레게의 워치메이커. 2 정희민, ‘부서진 배 위의 세이렌 아네모이아 4’, 2023, 캔버스에 아크릴, 잉크젯을 전사한 젤 미디엄, UV 프린트, 117×91cm. 브레게&프리즈 커미션 제작.
작품에 사용된 젤 미디엄은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꽤 견고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정 젤 미디엄은 온도에 따라 강도가 달라진다. 여름에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지만 겨울에는 비교적 단단하다. 몇 해 동안 서로 다른 물리적 조건 아래 작업하면서 재료에 대해 많이 익혔지만, 여전히 예측하지 못한 성질을 발견한다. 때때로 그런 우연을 의도하기도 하고. 소재를 이토록 잘게 조각 내는 방식은 처음 시도했는데, 조각이 작다 보니 퍼즐처럼 이미지를 더듬으며 위치를 맞추는 것이 까다로웠다. 하지만 작은 형태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거나 연결하며 새로운 효과를 발견하기도 했다.
안성석 작가의 영상 작품 ‘꺼지지 않은 알람 소리’는 제목처럼 아날로그 시계 종소리로 시작하고, 이 소리는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운드와 교차된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 같은 군인이 알람이 울리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이미지가 이어진다. 시간이라는 주제와 군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연결지었나?
안성석 (이하 안) 먼저, 알람 소리가 꺼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깨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시계 알람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자 군 복무 시절 사진병일 때 본, 군복을 입은 채 생을 마감한 군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그저 부대에 보급되는 하나의 물품이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곤 한다. 시간은 쉴 새 없이 ‘스트리밍’되고 있지만, 그들의 ‘스트림’은 그 시점에 멈췄다. 이것이 ‘은폐된 서울의 시간’이라고 생각해 작품으로 선보이게 됐다.
영상 후반부에 이르면 스테인드글라스 구조물이 있는 공간 속에 군인들이 공중에 박제된 장면이 있다. 굉장히 강렬한 이미지다.
안 전쟁 기념비와 같은 구조로 인물을 구성했다. 통상 전쟁기념관 기념비 속 군인들은 늠름한 영웅의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작업 속 구조물에서는 처참한 형태다. 입구가 숨겨진 공간에서 죽음에 가까운 모습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3 심소미 큐레이터와 안성석 작가. 4 정희민 작가.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 Salzburg·Seoul, Photo by artifacts.
두 작가는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보았나?
안 정희민 작가가 가상의 이미지를 물리적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며 자유롭게 표현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번 작품을 보며 곤충의 허물, 동물 가죽, 낙엽, 이끼, 껍데기, 혈관, 지방층 등이 떠올랐다. 어떤 생명을 품었던 유기체가 남긴 껍데기이자 영혼을 가진 존재의 보호막이 ‘여기 이러한 존재가 있었다’고 증명하는 것 같았다.
정 나는 가장 관념적인 존재를 상상하고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하는 반면, 안성석 작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뜨겁고 생생한 이미지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온도 차이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사실 내가 서울의 가혹한 속도를 견디며 감각하는 시간은 안성석 작가의 미궁 속 당사자의 시간에 가깝다. 그 때문에 작품을 보며 연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큐레이터에게 묻고 싶다. 전시를 기획하며 회화와 영상 작업을 두루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심 4개 도시 프리즈 전시를 모두 2인전으로 제안했다. 이는 전략적으로 제시한 숫자다. 상이한 매체를 다루는 두 작가 사이의 대화를 통해 예술의 이슈를 쟁점화하고, 이를 브레게의 맥락과 접목하면서 대화의 장을 넓히고자 했다. <스트리밍 타임>에서 회화와 영상 매체를 소개한 까닭은 ‘스트리밍’이라는 동시대의 문화 소비 현상을 재해석하려는 의도다. ‘스트리밍’은 동영상 서비스 등 라이브 콘텐츠를 의미한다. 디지털 문화에서의 소비 콘텐츠라는 기존 의미를 넘어, 시간에 대한 관념을 변화시키는 현상으로 파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회화와 영상을 함께 배치했다.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영상 작가와 전통적 평면을 다루는 회화 작가가 도전하는 서로 다른 맥락을 제시함으로써 이 주제의 문화적 지형도를 넓히고 싶었다.
뉴욕과 서울 전시를 마쳤다. 심 큐레이터는 각 도시의 시간을 어떻게 해석했나?
심 프리즈가 열리는 도시 중 뉴욕, 런던, LA는 서구의 대도시 중에서도 영향력이 강한 도시다. 이 지형도에서 서울은 비서구권이자 아시아의 문화 도시, 스트리밍 컬처 등 매우 광범위한 문화를 대표한다. 이러한 배경을 두고 4개 도시 전시에서 기존의 시간 관념을 해체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간의 축을 제시했다. 그 시작점인 뉴욕의 <오비탈 타임>은 4개 도시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선형적 시간을 전복하는 문화적 가치와 시간의 축을 회전시키는 순환성을 전달한 것이다. 이번 여정인 프리즈 서울에서는 동시대 디지털 문화인 ‘스트리밍’을 현실과의 영향 속에서 파악하고, 이로부터 파생된 새로운 시간에 접근하고자 했다.
프리즈 런던과 LA의 전시를 미리 소개한다면?
심 런던에서는 <스트리밍 타임>에 맞선 예술가들의 실천이 드러난다. 가속화한 시간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시간관이 펼쳐질 예정이다. 일상의 반복된 노동, 과도한 정보, 관습과 형식에 맞서 시간을 재발굴하고 확장하여 제시하는 주제다. 마지막 여정인 LA에서는 시간을 건축적 풍경으로 다루면서 경험의 장으로 관객을 초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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