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안경과 하얀 실험실 가운을 갖춰 입고 보안 시설을 통과한 끝에 영국 웨일스 남부 지방 카디프에 자리한 ‘왕립 조폐국’의 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곳 왕립 조폐국은 영국 국내에서 유통되는 화폐를 공식적으로 생산하는 곳이자, 30여 개국에서 사용되는 동전 수십억 개를 제작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폐 시설이다.
그리고 지난 2년간 왕립 조폐국은 버려진 휴대전화나 노트북 등 전자폐기물에서 금속을 추출할 놀라운 방법을 개발 중이다.
어느 작은 시범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속 가능한 귀금속 분야를 연구하는 화학자 헤일리 메신저를 만날 수 있었다. 메신저는 “모든 게 다 비밀이다!”면서 그곳 실험실 물품에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줬다.
메신저는 전자기기 속 회로기판 조각이 담긴 1리터 크기의 유리 플라스크에 “녹색 마법 용액”을 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메신저를 포함해 화학자, 화학 분석가로 이루어진 이들 연구진은 캐나다 스타트업 ‘엑시르’와 함께 버려진 노트북이나 휴대전화 속 인쇄회로 기판에서 금의 99%를 추출할 수 있는 친환경적이며, 에너지 효율적인 방식을 개발해 특허까지 획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말 왕립 조폐국은 수백만 파운드를 들여 이러한 방식으로 금을 추출하는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이 공장이 완전히 가동될 경우 매주 회로기판 90톤을 처리해 매년 수백kg에 달하는 금을 추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유리 플라스크 속 형광 혼합물에서 거품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메신저는 뚜껑을 나사로 고정시키고, 이 혼합물을 회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불과 4분 만에 회로기판에 숨어 있던 금이 녹아내리면서 액체가 침출됐다.
메신저는 이 화학 용액은 최대 20회 재사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마다 용해된 금의 농도는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처리 과정은 상온에서, 그리고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메신저가 또 다른 미스터리한 용액을 첨가하자 이내 금이 고체 가루 형태로 굳었다. 이 고체 가루는 이후 필터를 거쳐 용광로로 옮겨져 녹여진 다음, 엄지손톱 크기의 금덩이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러한 금덩이는 목걸이, 귀걸이, 커프스단추 등의 귀금속 장신구로 가공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활용 금속의 참된 아름다움은 반짝이는 장신구가 아닌 이처럼 극도로 능률적인 화학 공정의 확장성이다.
화학 용액
‘전자 쓰레기(E-waste)’, 혹은 ‘전기전자제품 폐기물(WEEE)’로도 알려진 전자폐기물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폐기물 종류 중 하나다.
‘유엔환경계획’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자폐기물의 양은 약 5000만 톤으로, 이는 지금까지 인간이 생산한 모든 민간 항공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무거운 크기다.
그러나 이중 공식적으로 재활용되는 전자폐기물은 고작 20%에 불과하며, 폐기물 대부분은 그대로 버려지거나, 매립지로 보내지거나, 소각된다.
영국의 가격 비교 서비스 업체 ‘유스위치’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 국민의 1인당 전자폐기물 배출량은 전 세계에서 2번째로 많았다. 노르웨이가 1위, 미국은 8위를 차지했다.
더 많은 휴대용 기기가 생산되고 전자제품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전자폐기물 또한 산더미처럼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9년, ‘세계경제포럼’은 2050년까지 연간 전자폐기물 배출량이 2배 이상 증가해 1억20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다른 모든 원자재처럼 금 또한 그 매장량이 한정된 자원이지만, 전 세계 금의 7%는 우리가 사용되지 않는 전자제품 속에 잠들어 있다.
이러한 금을 추출하기 위해선 현재 EU(유럽연합) 국가나 아시아 등지로 폐기물을 수출하는 방법이 있다. 이곳에선 폐기물을 극도로 온도가 높은 환경에서 제련한다. 그러나 이는 섬세하지 못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탄소 집약적이다.
한편 메신저는 “전자폐기물에서 가능한 한 많은 금을 다시 회수하고자 한다”면서 “왕립 조폐국은 기존 제련 방식보다 훨씬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상온에서 효율적인 방식으로 금을 추출할 수 있는 이러한 공정이 영국 내에서 지속 가능하게 자리 잡는 데 우선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왕립 조폐국의 마크 러버리지 커머셜디렉터는 “전자폐기물을 배출했다면 이를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 또한 우리의 책임이며, 이를 위해 그저 외국으로 보내버려선 안 된다”고 언급했다.
러버리지 디렉터는 지역별 재활용 공장들을 중심으로 전자폐기물 생태계가 만들어지면 폐기된 전자제품을 해상, 항공, 육로 등으로 운송하는 데 드는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면서 왕립 조폐국은 이 금 추출 기술을 전 세계 규모로 확잘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고자 전 세계 파트너사들과 협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실험실 가운과 주황색 안전모, 형광 조끼, 검은색 철제 장화까지 반납하고 나오니 새로운 가공 공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3000㎡ 크기의 공장 한쪽 구석엔 알록달록한 회로기판으로 가득 찬 커다란 봉지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이러한 회로기판은 버려진 노트북이나 휴대전화에서 추출된 것으로, 영국 전역의 전자폐기물 공급업체 50여 곳에서 배달됐다고 한다.
이러한 회로기판이 공장에 오게 되면 우선 검사 과정을 거쳐 커다란 은빛 깔때기를 통해 거대한 기계로 보내지게 된다.
이 공장 시설을 관리 감독하는 토니 베이커 책임자는 회로기판이 기계를 통해 분리되고 조각나는 과정에서 금이 아닌 부품은 따로 걸러지게 되고, 디지털 기술을 동원해 USB 포트처럼 금이 함유된 부품이 감지되면 500리터 크기의 원자로로 보내진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원자로에서 “녹색 마법 용액”을 첨가해 금가루를 추출하고, 이는 다시 금덩어리로 재탄생하게 된다.
회로기판엔 금이 포함되지 않은 부품도 너무 많기에 이러한 화학 공정은 금이 감지된 조각에만 적용된다는 게 베이커 책임자의 설명이다.
애초에 왕립 조폐국이 사용하는 원자재는 노트북이나 휴대전화 전체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회로기판이다. 이렇게 금을 추출하고 나면 금이 없는 부품은 이러한 부품을 사용하는 다른 업체로 모두 보내지므로 버려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편 러버리지 디렉터에 따르면 금 함량은 공급 원료에 따라 60~900ppm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현재 영국 왕립 조폐국의 이곳 폐기물 재처리 공장은 비교적 규모도 작고 금 추출만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이러한 공정 시스템을 확장해 하나의 회로기판에서 다른 귀금속도 추출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그리고 공정 중 남은 플라스틱이나 섬유유리 또한 일련의 공정 과정을 거쳐 에너지로 전환되면, 이렇게 생산된 에너지의 일부는 조폐국의 지역 에너지 공장에 공급되는 합성가스로 전환돼 전력 생산에 직접 사용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조폐국은 조폐 공장을 운영에 필요한 전력의 70%를 태양열, 풍력, 열병합 전력, 배터리 저장과 같은 재생 에너지를 통해 도달하겠다는 계획이다.
한편 이러한 공정이 더욱 확장해 금 외에도 더 다양한 귀금속을 추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전체 공정이 재생 에너지로 가동될 수 있다면, 전자폐기물을 그저 수출하기보단 영국 전역의 정제 시설에서 이를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러버리지 디렉터는 전자폐기물 공급업체, 가공업체로 구성된 생태계가 가정에서부터 재사용을 우선하고 장려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도록 유도하는 부분이 가장 어렵다고 지적했다.
베이커 책임자 또한 “(가정에서 폐기물을 버릴 때 등)처음부터 더 제대로 분류할수록 더욱 공정이 쉬워지며, 더 순도 높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면서 “우리는 귀금속이 필요하다. 매우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단순히 원하는 귀금속만 얻고 나머지는 버리자는 게 아니다. 회로기판의 모든 부품이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단 금을 추출하고 나면 남은 부분은 금이 아닌 전자폐기물과 함께 미세하게 분쇄된 뒤, 다시 각각 조각으로 분할되게 된다.
압축된 구리, 강철, 주석 조각은 다른 곳으로 판매되거나 재활용 전문 시설에 보내지게 되며, 섬유유리 처리 과정에서 남은 부분은 근처 시멘트 공장으로 보내진다. 또한 앞서 언급한 침출 용액 또한 최대 20회 재사용되고 나면 다른 곳으로 보내져 재활용될 계획이다.
러버리지 디렉터는 이렇듯 공정 시스템이 완전히 작동하게 되면 ‘제로 웨이스트’ 즉 아무것도 버려지지 않는 게 목표라고 했다.
한편 원료로 사용가능한 전자폐기물의 엄청난 양만큼 회로기판 등 기존 폐기물로부터 귀금속을 추출하는 이른바 ‘도시 광산’은 급성장하는 추세다.
캠페인 ‘당신의 전자제품을 재활용하세요’를 이끄는 비영리 단체 ‘매터리얼 포커스’의 케이트 힌튼 홍보 담당자는 오래된 노트북 3100만 개를 포함해 영국 가정이 쌓아 둔 오래된 전자제품이 약 5억2700만 개로 추산되며, 이는 그 무게만 해도 약 19만 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미국에서 매년 버려지는 휴대전화의 양을 계산해보면 6000만달러(약 800억원) 가치의 금과 은이 버려지고 있는 셈이다.
미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후 미국에선 매년 전자제품 10억 개 이상이 버려질 수 있으며, 이렇게 버려진 전자제품 속 잠들어 있는 금의 양은 현재 미국에서 채굴하는 금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크기라고 한다.
한편 현재 아주 적은 양의 금을 얻기 위해 실시하는 광석 채굴은 환경적 비용이 엄청나기에 금속은 “매우 재활용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이미 미국의 보석 기업 ‘링 베어’는 재활용된 금을 이용해 상품을 만들고 있으며. ‘판도라’ 또한 2025년까지 재활용된 금과 은만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지난 도쿄올림픽에선 모든 메달을 재활용 금속으로 만들었다. 당시 금, 은, 동메달 5000개를 제작하고자 휴대전화 600만 개와 거의 7만2000톤에 달하는 전자폐기물에서 금속을 추출했다.
한편 힌튼은 자신은 전자폐기물 재활용이 일반화되는 미래를 꿈꾼다면서 매년 버려지는 소형 전자폐기물의 양이 15만5000톤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활용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미래 친환경 기술을 위해 필요한 원자재를 낭비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설명했다.
“스마트 기기를 더욱 스마트하게 만들거나, 재생 에너지를 작동하게 하기 위해선 자원이 필요하다”는 힌튼은 “그러나 현재 전자폐기물을 제대로 재활용하지 못하기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술 (발달이 지닌) 문제는 놀랍고, 깨끗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보여지기에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 제품이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재료들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이 중요한 원재료들이] 사용될 수 있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힌튼은 전자폐기물 재활용이 주류로 자리 잡기 위해선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구리로 가득 찬 충전기, 플러그, 케이블 등 소형 전기제품의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영국 왕립 조폐국이 하고 있는 일도 좋지만, 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혁신을 위해선 막대한 연구 개발비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생산적이고 상업적인 프로세스를 개발하는 덴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존 광산 산업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녹색 기술이 더욱 발전해 귀금속의 순환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장서서 이러한 전환을 앞당기고 있다고 볼만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몇몇 예시를 살펴보면 미국의 ‘뉴 골드 리커버리’사는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폐기될 광산 찌꺼기에서 금 입자를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 중이며, 영국의 ‘N2S’사는 바이오 침출 기술을 이용해 파쇄된 IT 장비로부터 원자재를 추출한다. 2021년 추출한 구리만 해도 129톤에 이른다.
뉴질랜드와 호주의 친환경 화학 기업 ‘민트’는 비슷한 저 탄소 방식으로 전자폐기물에서 금, 구리 등의 다양한 금속을 추출하고자 도시의 바이오정제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민트사의 시드니 사업장은 호주 전체에서 배출되는 인쇄회로기판 폐기물(약 3000톤)의 약 25%를 처리하겠다는 포부로, 2024년까진 영국으로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매터리얼 포커스의 경우 향후 추출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영국에서 발생하는 전자폐기물로부터 연간 1300만파운드(약 210억원)에 이르는 주요 원자재를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울러 회로기판을 금, 은 및 팔라듐 등 다양한 귀금속을 추출할 수 있는 핵심 요소로 보고 있다.
영국 왕립조폐국의 비밀 화학식을 통해 앞으로 전자폐기물에서 금 이외에도 팔라듐, 은, 구리 등 다른 귀금속을 추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귀금속으로는 보석류뿐만 아니라 여러 제품 생산에도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러버리지 디렉터는 특히 주요 원자재를 회수해 전기자동차, 재생 에너지 생산 등에 그대로 투입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매우 들뜬 모습이었다.
“(전기차 생산 등으로 인해) 앞으로 우리는 구리가 특히 많이 필요할 텐데, 회로기판의 약 20%가 구리로 돼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금도 정말 중요하고, 그래서 채굴 금 의존도를 줄이려는 것도 맞지만, 사실 구리는 영국의 다른 산업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추출 기술이 발달하면) 영국에서 직접 자원을 생산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 공장 견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베이커 책임자는 “한 사람의 폐기물이 다른 이에겐 원자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한다”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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