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을 날고, 이런 설정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을 보여주지 않은 채 초능력을 보여줄 순 없었다. 초반이 지루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이 길게 걸리더라도 더 많이 개개인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12부작, 혹은 16부작으로 빠른 전개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니즈를 맞출 수도 있었지만, 강풀 작가는 20부작이라는 긴 회차를 포기하지 않았다. 봉석과 희수, 도훈 등 자식 세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무빙’은 이들 사이 오가는 풋풋한 사랑의 감정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내면서 이야기를 차근차근 쌓아 나간다.
500억이라는 큰 제작비가 투입된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에 대해, 초능력자들의 카타르시스 넘치는 활약을 기대한 시청자들은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극 초반에도 프랭크가 초능력자들의 뒤를 쫓으며 긴장감을 조성하는가 하면, 부모 세대 초능력자들과 대결을 펼치며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장면들이 없진 않았다. 그럼에도 화려한 액션 등으로 이목을 끌곤 하는 여느 블록버스터 작품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느린 전개였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선 12회까지 공개된 현재. 차곡차곡 쌓인 서사를 바탕으로, 숨겨졌던 비밀들이 베일을 벗으면서 더 큰 감동과 여운이 만들어지고 있다. 봉석과 미현, 그리고 희수와 주원 등 홀로 아이를 키우던 부모들의 이야기 위에, 그들의 과거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한편 애틋함이 더욱 배가되기도 했던 것. 지금은 “‘무빙’이 해외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서사’였다”, “20부작도 짧게 느껴진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강 작가의 의도이기도 했다. ‘큰 제작비가 투입된 판타지 드라마’에 대한 기대에 걸맞게 빠르게 본론으로 진입, ‘보는’ 재미가 있는 화려한 장면들을 펼쳐놓을 수도 있었지만, 강 작가는 탄탄한 전개로 서사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개개인들의 사연을 통해 몰입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국 알맹이 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 강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누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면 뜬금없고 유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를 온전히 보여준다면, 시청자들도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이 생긴다고 여겼다”라며 “20부작이 짧다고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러 채널과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는 쏟아지고, 시청자들은 이를 따라잡기 위해 2배속 재생, 심지어는 유튜버들이 제공하는 ‘요약 콘텐츠’를 통해 콘텐츠를 빠르게 소비하고 있다. 가끔은 지지부진한 초반 전개를 견디지 못하고 혹평을 쏟아내는가 하면, 빠른 전개로 쾌감을 배가하는 콘텐츠들을 향해 ‘사이다 전개’라며 만족감을 표하기도 한다. ‘무빙’ 역시도 초반까지만 해도 일부 시청자들의 ‘지루하다’는 혹평을 받아야 했다.
이에 10부작, 12부작으로 회차를 줄여 가볍고, 빠른 전개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무빙’처럼, 긴 서사만이 줄 수 있는 깊이 있는 재미가 사라지는 흐름은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또 다른 20부작 드라마 MBC ‘연인’ 또한 반전 평가를 끌어내며 긴 서사만이 선사할 수 있는 재미를 선사 주고 있는 것.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을 다룬 이 드라마 또한 초반까지만 해도 낙향한 사대부 유교연의 첫째 딸 유길채(안은진)의 해맑은 매력을 향한 호불호로 인해 저조한 반응을 얻었지만, 8회가 지나고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된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을 마주한 길채가 각성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시청자들이 깊게 몰입하는가 하면, 그와 장현(남궁민)의 애절함 또한 극대화되고 있는 것. 초반 캐릭터의 성격과 또 그 배경을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캐릭터들의 변화와 감정 역시도 더욱 깊어진 셈이다.
이와는 반대로 16부작에서 12부작으로 회차를 줄이고, 카운터의 서사는 배제한 채 악귀들과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경이로운 소문2: 카운터 펀치’는 오히려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아야 했다. 새 시즌을 시작하면서 스케일을 키우고, 액션의 화려함은 배가했지만, 주인공 소문의 아픈 사연을 통해 공감을 끌어냈던 전 시즌보다 저조한 반응을 얻은 것이다.
물론 시청자들의 변화한 시청 방식을 따라잡고, 작품의 성격에 맞게 회차를 유연하게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볍고, 빠르게. ‘사이다’ 같은 전개가 넘치는 흐름 속, ‘무빙’과 ‘연인’이 알려주는 서사의 중요성이 더욱 의미 있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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