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에선 병원 신생아실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루시 렛비은 영아 7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런데 거의 25년 전 영국의 또 다른 병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바 있다.
1991년 봄, 영국 남동부 링컨셔주 ‘그랜섬&케스티븐 종합병원’의 어린이 병동에선 2달간 연속해서 환자 4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9명이 의식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전까지만 환자 사망률이 높지 않던 병동이었다.
당시 흉부 감염으로 해당 병동에 입원 중이었던 생후 5개월의 폴 크램튼 또한 의식을 잃고 빠르게 회복되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그 누구도 설명하기 힘든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폴의 아버지 데이비드 크램튼은 “정말 두려웠다”면서 “아이가 아픈데 그 원인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부모인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하던 상황”이라고 회상했다.
폴이 처음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건 퇴원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다행히 폴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완전히 회복해 퇴원했다.
며칠 후 데이비드는 경찰로부터 폴이 약물 투여로 인해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렇게 범죄 수사가 시작됐다.
다음 날, 데이비드와 다른 피해 아동 가족들은 사건의 전모를 깨닫기 시작했다.
데이비드는 “당시 그랜섬&케스티븐 종합병원에서 환자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면서 “그렇기에 굉장히 큰일로 이어지리라고는 분명히 짐작했다. 그저 얼마나 큰일인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뒤, 해당 병원의 소아과 병동 간호사였던 베벌리 앨릿이 영아 4명을 살해한 혐의, 폴을 포함한 다른 영아 3명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 다른 영아 6명에겐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힌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앨릿의 재판이 끝난 뒤 데이비드는 잉글랜드 노팅엄 법정 앞 계단에서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진실 규명을 위한 조사를 요구했다.
데이비드는 BBC ‘노스웨스트 투나잇’과의 인터뷰를 통해 “앨릿의 이러한 범죄는 보건 당국이 점점 악화하는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일이 더 악화하지 않도록 막고자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앨릿의 재판 직후 변호사 출신으로 제1대 경찰민원담당 위원장을 지낸 세실 클로티에의 지도하에 조사가 이뤄지게 된다.
그렇게 1994년 제출된 조사 보고서는 환자들이 사망하거나 의식을 잃을 때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여러 주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중에서도 의료진 그 누구도 동료가 의도적으로 아기들을 해친다는 걸 믿을 수 없었기에 앨릿이 2달 이상 범죄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번 레트비 사건과도 유사한 부분이다.
몇몇 병원 고위 관계자들이 처음 몇 달간 레트비를 우려했으나, 책임자를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들 중 누군가가 살인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레트비는 1년간 범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비의 살인을 더 빨리 막을 순 없었을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빌 커컵은 2022년 ‘이스트 켄트 병원 사건’ 등 과거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NHS(국민건강서비스)의 여러 사건 조사를 이끈 인물이다.
커컵 박사는 조사 과정 중 그 어떠한 영아도 의도적으로 해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때 보통 병원 조직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커컵 박사는 사건 징후에 대한 병원 측의 대응 방식, 즉 문제 제기 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 더불어 설령 이에 대응한다 해도 적절치 않은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환자의 몸 상태를 면밀히 기록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길 바란다는 커컵 박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경계하기 매우 어렵다”고 언급했다.
그렇기에 예를 들어 병원 전산에 비정상적인 사망자 수가 입력될 경우 자동으로 경고창이 뜨는 시스템 등이 마련되면 좋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자신의 친구와 동료는 고의로 환자를 해치지 않는다고 믿는 인간의 편견이 경영진의 의사 결정에 미칠 영향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커컵 박사는 “사람은 개별적인 사건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분야에서도 상황을 실시간으로 추적 및 기록할 수 있다면 (문제 발생 시) 대응하게 된다는 점이 증명됐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시스템이 마련되면) 누군가 ‘비정상적인 흐름이 감지됐습니다.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는 결과입니다.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다시 말해, 더 강력한 균형과 견제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에 더해 지난 수년간 커컵 박사는 일반적으로 검시관에게 넘어가지 않는 사망 또한 살펴보는 검사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맨체스터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환자 약 250명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해럴드 쉽먼 사건에 대한 공개 조사에서도 이러한 검사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간호사 가 ‘체스터 백작부인 병원’의 신생아실에서 영아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해인 2015년에도 커컵 박사는 이러한 검사의 제도를 도입하지 못한 영국 보건 당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가 있은지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검사의 제도가 도입됐다.
커컵 박사는 이를 환영하면서도 너무 늦은 감이 있다며 아쉬워했다.
만약 검사의 제도가 미리 마련됐다면 사건이 달라질 수 있었겠냐는 질문에 커컵 박사는 “만약 누군가 해당 사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패턴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면, 적어도 누군가는 더 열심히 해당 사건에 대해 들여봐야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어떤 시점에선 발생했어야 할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죠. 그리고 누군가가 ‘여기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앨릿 사건과 이번 사건 사이엔 또 다른 유사점도 있다.
우선 앨릿 사건의 경우 폴의 혈액 샘플에서 비정상적인 수치의 인공 인슐린이 검출되며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또한 회복 중인 아기 2명에게 인슐린을 투여해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인슐린 중독 방법은 다른 살인자들도 사용한 방식이다.
일례로 그레이터맨체스터주 스톡포트의 ‘스테핑힐 병원’에서 일하던 빅토리아 추아는 환자 2명을 살해하고 여러 환자를 인슐린으로 중독시킨 혐의로 2015년 5월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영국에서 크게 보도될 만큼 유명한 사건이었으며, 심지어 스테핑힐 병원은 레트비가 근무하던 체스터 백작부인 병원에서 불과 6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당시 레트비의 동료 중 그 누구도 자신의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추아 사건 간 유사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기 2명의 혈액 검사 결과 인슐린 수치가 높게 나왔음에도 원인 파악을 위한 조사가 크게 이뤄지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으며 충격적인 사건일지라도 나름의 이유를 들어 합리화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커컵 박사는 “앨릿 사건을 통해 의료진들이 적어도 과거엔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여겼던 동료의 고의적 살인을 그래도 약간은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본다”면서 “이번 비 사건에서 보듯 심각하게 가능성 있게 보진 않으나, 적어도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과거에 비하면 조금 덜 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어느덧 무사히 자라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아들 폴을 바라보며, 아들에게 닥쳤을 수도 있던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다는 데이비드는 NHS를 여전히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NHS는 우리 사회가 소중히 여겨야 할 시스템”이라는 데이비드는 “살다 보면 이러한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데이비드는 앨릿 사건과 같은 사건이 극히 드물긴 하나, 우려가 제기된 부분에 대해선 유의미한 변화가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과거 앨릿이 환자들을 해치고 다니던 시절에 비해선 더 많은 안전 조치가 도입됐다고 확실히 믿지만, ‘왜 자꾸 비슷한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선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비극이 계속 반복되도록 놔둘 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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