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민간 제대혈 은행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제대혈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늘어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공공 제대혈 은행을 늘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텍사스 휴스턴에 사는 프라빈 구디파티와 람야 라지 부부는 2019년에 첫 아이 키안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이들은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탯줄에서 채취한 혈액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결정이었다. 선택지는 버리거나 기증하거나 나중에 키안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것이었다. IT 전문가인 구디파티와 예술가인 라지의 답은 명확했다.
구디파티는 "제대혈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 비영리 은행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여러 제대혈 은행과 상담한 후 '코드 포 라이프 파운데이션(Cord for Life Foundation)'을 선택했다.
제대혈이 귀중한 이유는 그 안에 있는 혈액 줄기 세포 때문이다. 혈액 줄기 세포는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나 면역 체계의 일부가 되는 백혈구 등 인체 내 모든 혈액 세포로 자라날 수 있다. 혈액 줄기 세포는 백혈병 같은 혈액 질환을 치료하는 데도 쓰이고 있다. 이런 혈액 줄기 세포는 제대혈뿐만 아니라 골수에도 있다. 때문에 여러 혈액 질환 치료에 외과적 골수 이식이 포함되기도 한다. 골수 이식은 환자 부모의 골수에도 질병이 있는 경우, 골수가 맞는 기증자를 찾아야 한다. 적합한 기증자를 찾아도 환자의 신체가 기증된 세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부 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제대혈 이식은 일반적인 수혈과 비슷해 비교적 간단하다. 냉동된 제대혈을 해동하고 줄기세포의 생존 여부를 검사한 다음 정맥에 주사한다. 부모가 태어날 때 제대혈을 개인적으로 보관해 둔다면, 이론적으로는 나중에 자신의 혈액 줄기 세포를 공급받을 수 있다(다만 제대혈 줄기 세포가 살아 있는 채로 가장 오래 보관된 기록이 20년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대혈은 또 공공 은행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기증할 수도 있다.
하버드의대 소아과 교수이자 보스턴 아동병원 줄 기세포 프로그램 책임자인 레오나드 존은 "매년 수천 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이식 수술에 혈액 줄기 세포가 쓰인다"고 말했다.
존은 제대혈 세포가 거부 반응 위험과 오염, 감염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제대혈 세포는 이식 수술이 필요없고 자가 재생이 가능하다. 그는 "제대혈 줄기 세포 하나로 3.4리터의 혈액을 복제하고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엔 의료 전문가들이 제대혈을 겸상 적혈구 빈혈증(적혈구의 모양이 낫 모양으로 되는 유전자 돌연변이) 같은 혈액 질환을 치료하거나 백혈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희귀 유전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도 제대혈 세포가 사용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제대혈은 잠재적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자원으로 꼽힌다. 그런데 아기의 제대혈을 은행에 보관하는 게 이 자원에 대한 미래 접근성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는 부모는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제대혈 처리에 대한 인지도는 국가별로 다르다. 첨단 세포 치료 임상시험 데이터를 제공하는 '셀 트라이얼 데이터(Cell Trials Data)'에 따르면, 제대혈 은행 보관률은 매년 출생아 중 3%가 제대혈을 보관하는 미국이 가장 높다. 인도에서는 출생아의 0.4%, 영국에서는 출생아의 0.3%, 프랑스에서는 0.08%만이 제대혈을 은행에 보관하고 있다. 전 세계 제대혈 은행 시장은 2020년 기준 13억 달러 규모였으며, 2030년쯤이면 45억 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에겐 아기의 혈액을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제대혈 보관 자체가 별다른 위험이 없고, 나중에 아기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혈액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혈이 사적 자원이 아닌 공공재로 사용된다면, 가장 강력한 보건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미국 소아과학회에 따르면 전 세계 민간 은행에 보관된 제대혈의 양은 공공 은행에 비해 6배 이상 많다. 하지만 치료 목적으로 은행 밖으로 나오는 제대혈은 공공 은행이 약 30배 더 많다.
존은 제대혈이 매우 귀중한 자원이지만, 반드시 개인적으로 보관해야만 나중에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나는 항상 부모님들에게 여유가 있다면 제대혈을 개인적으로 보관하라고 말한다"면서도 "여유가 없다면 제대혈을 개인적으로 보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공공 제대혈 은행이 계속 늘어나고 기증이 더욱 다양해지면, 필요할 때 자신에게 맞는 제대혈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또 부모들이 민간 은행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설정하고, 신중하게 은행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인체 조직을 보관하는 모든 절차에서는 조직이 감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대혈을 보관하는 의료진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존은 제대혈은 유통기한이 한정되어 있어 무기한으로 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모들이 인지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일부 국가에서는 제대혈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버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간접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항균제 내성 증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제대혈을 사용하면 수술을 피할 수 있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약물 연구 센터 '웍하르트 리서치 센터(Wockhardt Research Centre)'에서 일하는 과학자 하리하란 페리아사미는 "(항생제가 듣지 않는) 다제내성 박테리아 감염이 인도 소아 골수 이식 환자들에게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병원 입원 기간을 늘리고 더 비용을 들게 한다고 있다. 반면, 제대혈에서 나온 혈액 주사는 그렇게 높은 위험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제대혈의 힘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캐나다의 민간 제대혈 은행 회사들의 주장을 조사한 한 연구는 온라인 마케팅 자료에 "상당한 과대 광고"가 있었다고 밝혔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제대혈을 필요로 하게 될 확률을 과장하는 것부터 제대혈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을
부풀렸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자금을 지원한 '캐나다 혈액 서비스'는 사람들 중에 제대혈이 필요해질 확률은 2만 명 중 1명(0.005%)에서 25만 명 중 1명(0.0004%) 사이라고 말한다. 인도에서는 생후 20년간 저장된 제대혈이 필요해질 확률이 0.04%~0.005%로 추정된다.
인도 북부 도시 구루그람에 있는 클라우드나인 그룹 병원의 산부인과 전문의 솜야 굽타는 "제대혈은 모든 것을 치료하는 마법의 약이 아닌데도 '생물학적 보험'이라는 식으로 홍보된다"며 "이는 그릇된 이해를 만들어낼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아기의 제대혈을 은행에 보관하면 아기와는 100% 일치하겠죠. 하지만 치료하려는 질환이 희귀 질환이고 제대혈에 질병을 유발하는 요인이 남아 있다면 그 제대혈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인도에는 거의 없는 공공 은행 시스템에 찬성했다. "공공 제대혈 은행을 시급히 설립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도의 부모들은 제대혈을 개인 은행에 보관하기 위해 거액을 지불하거나 제대혈을 폐기한다. 인도 혈액 및 골수 이식 학회 등록 데이터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인도에서 진행된 비혈연 제대혈 이식은 60건에 불과했다.
공공 제대혈 은행이 더 풍부한 미국에서는 제대혈과 관련해 약간 다른 논쟁이 벌어진다. 예컨대 제대혈이 특정 유전 질환 치료에 사용될 수 있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
버트랜드 마이트는 두 살 때 자신의 제대혈 세포를 주입받았다. 버밍엄 앨라배마 대학 휴 카울 정밀 의학 연구소의 소장이자 버트랜드의 아버지인 매튜 마이트는 버트랜드가 당시 뇌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버트랜드가 앓고 있던 질환이 밝혀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훗날 버트랜드는 NGLY1(N-글리카나아제1)이라는 효소가 결핍된 복합 신경 장애 'NGLY1 결핍증' 진단을 받은 최초의 환자가 됐다.
마이트는 "돌연변이가 제대혈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줄기세포가 뇌 손상의 일부를 복구하고 결손된 효소의 기능적 버전을 생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효소를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일시적으로 뇌의 백질(white matter) 손실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있기를 바랄 만한 이유가 있었죠."
버트랜드에게 제대혈을 주입하는 것은 듀크 대학 소아과 교수인 조앤 커츠버그가 뇌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을 가진 어린이에게 줄기세포 주입 효과를 테스트한 2009년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주입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버트랜드에게 도움이 된 듯했다. 2년 동안 MRI 스캔 결과 뇌의 백질이 더 이상 손실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트는 또 아들의 운동 능력도 개선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이 숟가락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아들의 옹알이도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일관성 있고 의도적인 형태로 변했습니다. 끊임없는 쇠퇴를 멈추게 하는 계기가 됐죠. 덕분에 정식 진단을 받을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마이트는 그 진단이 결국 버트란드에게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제공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버트랜드는 2020년에 1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이트는 주입된 세포에는 베르트랑의 장애를 일으킨 것과 동일한 돌연변이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궁극적으로 그의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선 환자 자신의 제대혈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질병을 유발한 동일한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맞는 기증 제대혈을 사용한다면 효과를 볼 가능성이 높다.
피츠버그 대학 피츠버그 메디컬 센터 어린이 병원에서 실시한 한 소규모 임상시험은 겸상 적혈구 빈혈, 대사 장애, 헌터 증후군, 면역 결핍 등 20가지의 다양한 비암성 유전 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 44명을 치료하기 위해 공공 은행에서 기증받은
제대혈을 사용했다. 이 임상시험을 통해 기증된 제대혈이 다양한 유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치료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다른 아이를 돕고 싶다는 바람이 텍사스에 사는 구디파티와 라지 부부가 아들 키안의 제대혈을 기증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구디파티는 "키안은 누군가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세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어요. 이 귀중한 자원이 생물학적 폐기물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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