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과 일본의 '셔틀 외교'가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성과를 보여줬다. 하지만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국민들 또한 일본에 대해 여전히 유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북한은 이러한 한국의 행보에 불쾌감을 나타냈는데,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접근을 배신행위라고 비난하며 한국 정부를 '미국과 일본의 꼭두각시'라고 폄하했다. 이러한 북한의 비난은 늘 반복됐으며, 그것은 심지어 문재인 정부가 2018년에 대북 접근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인 201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북한이 끊임없이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고 새로운 무기 개발에 몰두하는 등 호전적인 양상을 보이는 현재, 일부 사람들은 한국의 대일 접근 정책과 북한군 관련 정보의 공유 등과 같은 한미일 공조 움직임으로 인해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안보를 통한 자유와 경제 성장
1950년대 서독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 당시 발발했던 한국전쟁으로 인해 서독은 상실했던 주권의 상당 부분을 바라던 것보다 훨씬 빨리 되찾았으며, 그와 함께 재무장에 관한 논의도 흘러나왔다.
이때 서독의 기본 원칙이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인접국들과의 확고한 동맹을 유지하는 입장과 관련해 독일 통일의 방해 요소로 여기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했다.
1949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1951년에 유럽 평의회 및 유럽 석탄철강공동체의 회원이 됐으며, 1955년에는 나토에 가입했고 1957년에는 유럽 경제공동체와 유럽 원자력 공동체에 가입했다.
이러한 정책은 한국전쟁과 같은 유사한 상황이 독일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존재했던 냉전 시절, 안보를 보장하는 동시에 다자간 정책 구현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로의 회귀를 차단하는 효과를 가졌다.
해당 정책은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당 소속의 당시 서독 연방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가 실시했는데, 이는 아데나워 총리가 두 차례에 걸친 대전을 겪으면서 서독이 더 이상 두 번의 전쟁 직후와 같은 약체가 되어서는 안 되며, 유럽의 안보 체제 안에서만 자유와 경제 성장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 최상의 목표는 자유와 민주주의
이에 따라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가 최상의 목표였으며, 통일을 포함한 다른 목표들은 이보다 아래에 위치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의 쿠르트 슈마허 대표는 아데나워의 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로 인해 독일 통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사회민주당이 시장경제 도입과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서독 건국 이후 사민당이 임시 전당대회에서 소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마련한 1959년까지 10년이나 걸렸으며, 그 후 10년이 지난 1969년에야 처음으로 집권을 할 수 있었다.
사민당이 집권한 1969년에는 서방 동맹국들과의 안보 체제가 더 이상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는데, 독일과 프랑스의 우호 협약인 엘리제조약이 1963년에 이미 맺어진 상태였다. 이에 근거해 유럽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독일과 프랑스의 협력 관계에 기초해 결정됐으며, 그에 따라 독일의 독자 행보는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다.
◇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
위의 정책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특히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3월 10일 소련의 지도자였던 요셉 스탈린이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서방 승전국에 보냈던 소위 '스탈린 노트'를 언급했다.
이 메시지에서 스탈린은 갑자기 서방 승전국들에 독일이 중립국이 된다면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독일 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것은 당시에 막 시작됐던 서독의 서방과의 동맹 정책의 종료를 의미하는 동시에 당시 논의를 이어가던 유럽 방위공동체 및 독일군 재창설 논의의 종식을 뜻했다.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 연방 총리와 서방 전승국들은 스탈린과 외교 서신을 주고받은 후 이 제안을 거부했다. 소련이 예를 들면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국가에서 어떻게 민주주의 제도의 기반을 점진적으로 파괴하고 종국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도록 했는지, 그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전쟁의 참상이 알려지고 유럽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존재하는 가운데, 당시 서독 정부 입장에서 그러한 실험을 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당시 스탈린 노트에 화답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통일을 앞당길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가 2차 대전 승전국 간의 협상을 통해 1955년에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과 통일을 이뤘다고 얘기한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이 됐으며 이러한 내용은 헌법에도 명시됐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전략상으로나 경제적 측면에서도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돌이켜 볼 때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 관계는 서독에 큰 행운이었다. 그로 인해 서독의 경제가 부흥해 짧은 기간에 경제적으로 서유럽의 선도 국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 국가들과의 경제 연합이 없었다면 경제적 성취가 불가능했을 텐데, 서독의 경제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강력한 수출 증대에 기인했던 것이다.
서독은 나아가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동독인이 분단 상태인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게 만든 흡인력을 지닌 국가로 발전했다. 그로 인해 베를린장벽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다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절을 경험했지만, 헬무트 콜 총리와 기독교민주당이 마침내 통일을 이룬 모토는 언제나 변함없이 단순한 통일이 아닌 '자유통일'이었다. 독일 분단이 내포한 아픔을 생각하면 자유를 기반으로 한 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해법이었던 것이다.
◇ 원하는 방식의 통일
현재 동북아시아의 지정학 및 지경학적 상황과 냉전 시절 독일의 사례를 바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요소는 존재한다. 그것은 원하는 통일의 방식이다. 통일은 어떤 방식이든 관계가 없는가? 원하는 통일은 자유를 기반으로 한 통일인가?
한국은 서독과 마찬가지로 다자적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큰 수혜 국가이며, 이러한 이득은 사회 질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게 자아실현을 할 수 있고 의사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이동 및 집회의 자유 등을 보장받고 있다.
서독의 입장에서 서방과의 동맹을 확고하게 결정한 것은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통일의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한 기대로부터 거리를 둔 행동이었으며, 이로 인해 서독은 확고한 자유를 원했던 동독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본다면, 한국은 자유민주 국가들과의 동맹에 의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자유통일에 장기적으로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옮긴 이: 김영수(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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