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멕시코 시절의 환희가 그림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아트부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이벤트다. 이 시기가 되면 부산은 온통 축제 분위기다. 해운대 해수욕장 앞 포장마차 촌은 온갖 다양한 언어로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로 가득하고, 도심의 클럽과 바 그리고 호텔의 라운지는 외지인들과 현지인들이 어우러지는 파티의 현장이다. “아트 페어는 핑계고, 사실 많은 갤러리 및 아트 관계자들이 그냥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놀고 싶어서 아트부산을 찾는 것 같다”라며 아트부산 관계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말은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다. 온 도시에 흐르는 행복한 흥분의 분위기가 바로 아트 부산의 자랑이다. 올해도 아트부산이 찾아왔다. 5월 4일 프리뷰를 시작으로 7일까지 사흘간 열리는 이번 미술품 시장에는 22개국 145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에스콰이어〉의 미술 담당 기자 역시 아트부산을 돌아보고 왔다. 이 지면엔 아트부산에서 미술 기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래서 통장에 돈도 없으면서 대체 얼마냐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던 10개의 작품들을 꼽았다. 아트부산에 갈 계획이라면 이 작품들이 어디 있는지 숨바꼭질하듯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1. 김보희 ‘Towards’, 2022
BTS의 RM(은 물론 기자도)이 좋아하는 작가로도 유명한 김보희 선생님은 보통 큰 그림을 그린다. 100호 200호짜리 미술관의 벽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들. 그런데 이 그림은 10호다. 53 x 45cm짜리김보희의 그림은 만나기 무척 힘든 데다가, 무려 신작. 보통의 주택에 사는 사람도 거실에 걸 수 있는 크기다. 저 검은 바탕 위에서 마치 발광하듯 빛나는 몬스테라 꽃을 보고 잠시 정신을 잃어 ‘이 그림 얼마냐’며 호기롭게 물어봤으나 통장의 잔고를 생각하고 조금 기가 죽었다.
2. 이응노 ‘PEOPLE’, 1983
아트 페어에서 소박한 월급쟁이를 설레게 하는 건 역시나 소품이다. 그중에서도 ‘뮤지엄 레벨’이라 할 수 있는 작가,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나 미국의 MOMA처럼 국가대표 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한 작가들의 소품 말이다. 이응노의 이 작은 작품을 보고 당장 가격을 물어본 이유다. 바지우 갤러리는 1980년대 이응노 작가가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의 마더 갤러리였던 곳이다. 바지우 갤러리는 꽤 많은 이응노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지난 해 키아프에 들고 왔더랬다. 결과는? 물론 다 팔렸다. 그 이유는 바지우 갤러리에 들러 5호도 안되는 이 작품의 가격을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3. 율리아 아이오실존의 소품들
지난 해 파운드리 서울에서 열린 율리아 아이오실존의 개인전에서 그의 작품들을 처음 봤을 때 직감했다. ‘작은 작품들은 다 팔리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갤러리 관계자에 따르면 그림이 없어서 팔지 못했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이 여성 작가의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세어 나온다.
4. 최수인의 신작들
오른 쪽에 있는 두 작품이 아트부산을 위해 이번에 그린 신작이다.
2019년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린 최수인 작가의 개인전에서 2m는 족히 되어보이는 대형 작품들을 만났다. 형체가 뭉개진 상처입은 검은 짐승, 무너지는 설산 위에 피처럼 흐르는 타검은 타르, 불에 타 버리는 초록과 파랑 등의 이미지가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만으로 3년이 넘게 흘러 그의 작품을 아트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작가가 구상을 이미지로 표현해내는 방식은 그대로였으나 그가 자신의 속에서 끄집어 내는 감정들은 한층 여유롭고 차분해져 있었다. 사람이 없는 때를 기다려 한참을 그 앞에서 바라봤는데, 어른이 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5. 도나 후앙카 ‘BLISS CLIT(AZUL)’, 2022
마곡동의 전시공간 스페이스 K에서도 개인을 열고 있는 도나 후앙카는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1980년대생 여성 아티스트 중 하나다. 그는 점토, 강황, 달걀, 커피 등 다양한 색감의 천연의 식재료를 여성의 신체에 입힌 후 이들이 전시관을 돌아다니며 색을 묻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때 이 퍼포머들의 신체를 클로즈업해 사진으로 찍고 이 사진은 배경으로 회화를 완성한다. 그의 회화에는 퍼포먼스가 녹아 있는 셈이다. 작품을 살 때는 취향도 중요하지만, 미래 가치를 위해 그 작가의 작품들이 어디에 걸렸었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전 연표에 ‘미술관’이 여럿 등장한다면 체크해둘 것. 후앙카 역시 여러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프리뷰 때부터 홀드된 상태인 데는 이유가 있다.
6. 백향목의 작품들
#39;Messenger 1#39;(좌상), #39;Messenger 2#39;(좌하), #39;Mother#39;s Table#39; 모두 2023년 작품이다.
아트부산을 거닐다가 이상하게 멋쟁이들이 많아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갤러리스탠 앞에 당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갤러리스탠은 아트부산의 여러 갤러리들 중에서도 화려한 갤러리스트들이 포진한, 아마도 제일 잘 놀 듯한 갤러리다. 그런데 이 갤러리를 잘 놀기만 하는 게 아니다. 부산에 올 때마다 모든 작품을 다 파는 걸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날은 기자 프리뷰가 끝나기도 전에 백향목 작가의 작품 석점이 모두 팔렸다. 살 것도 아니면서 “아니, 기자 프리뷰도 안 끝났는데 대체 누가 샀느냐”고 따져봤더니 이미 갤러리 VIP들이 페어 전부터 돈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 사는 게 어려워서야 원.
7. 이안리 ‘두 개의 달’, 2013
갤러리스트들 사이에서 이안리의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한지는 꽤 됐다. 이번 아트부산 원앤제이 갤러리 부스에 걸린 이안리의 작품 ‘두 개의 달’은 그러나 최근에 우리가 본 이안리의 작품과 다르다. 작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사고의 패턴과 주제 이에 걸맞은 표현의 양식 혹은 이미지 언어를 평생 찾고 만든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언어 문법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처럼 보여 더욱 반갑다. 종이에 먹과 과슈를 칠하고 이것들을 실로 엮어 층을 쌓고 다시 그걸 액자에 넣었다. 보는 순간 아트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깨달을 것이다. 아, 이 사람은 고유하다, 라고.
8. 김한샘 ‘횃불을 든 자’, 2023
“지난 번 아트 페어에서 사람들이 오픈런을 해서 김한샘 작가 작품을 사더라니까요.”. 한 갤러리스트의 말을 듣고 디스위켄드룸으로 향했다. 몇년 전부터 서울에서 제일 핫한 아티스트들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갤러리다. 김한샘이 어딨습니까? 라고 묻자 갤러리스트가 가리킨 것은 작은 돌들이었다. 금속과 나무 아기자기한 타일로 장식된 작은 함 안에는 돌 위에 붙인 금테 프레임 안에 사자의 형상을 한 용사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이 귀여운 걸 어떻게 갖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을까?
9. 루카스 카이저 ‘Gardner’, 2023
김한샘에서 고개를 들자 익숙한데 생소한, 흔한 듯 하면서도 매우 유니크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모눈과 빗금, 웨이비한 패턴들을 꼼꼼하게 짜서 종이위에 쌓고 쌓고 또 쌓고 칠한 그 그림들은 유머러스하면서도 기괴하고, 귀여운듯 하면서도 어딘가 서늘하다. 자세히 보면 얇은 선들 하나하나에 수작업의 흔적이 묻어 있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 손목이 아파올 만큼 노동집약적인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이 패턴들이 그림을 고유하게 만든다.
10. 최욱경 ‘Untitled’, 1977
뉴 멕시코 시절의 환희가 그림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계속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최욱경의 그림이었다. '설명적인 것이나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감성 본연의 그 자체를 시각적 용어로 환원시켜 음악의 추상성과 같은 것을 표현해 관객에게 새처럼 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전달하려 했다는 최욱경은 색연필로 이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행복했을까? 꿈결 같은 이 그림에선 1976년부터 잠시 머물렀던 뉴멕시코 시절, 그녀가 생전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던 시절의 환희가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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