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숫자에 속아 소중함을 잊을 때, 영화 '4등(2016)'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리뷰] 숫자에 속아 소중함을 잊을 때, 영화 '4등(2016)'

메디먼트뉴스 2023-05-05 01:09:18 신고

3줄요약

[메디먼트뉴스 김민서 인턴기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해하고 청량한 성장 서사는 이 영화에 없다. 도리어 그 성장을 가로막는 '숫자'로 굴러가는 세계의 폐단, 그리고 이에 기인한 어른들의 집착과 폭력, 방관에 대해 지적하는 사회 고발 영화에 근접할 것이다. 극의 초반, 영화는 국가적 우상을 전면에 내세운다. 2관왕을 달성한 골프 영웅 박세리의 쾌거에 대중은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이때 카메라가 비추는 건 그 소식에 환호하는 인간이 아닌, '4등'이라는 제 성적에 자조하는 인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전반적인 톤 앤 매너를 짐작하게 된다. 그 어떤 승부의 세계가 다 그러하다지만, 스포츠 분야는 유독 더 가혹하게 숫자의 존재가 군림하는 경쟁터다. 등수로 꼬리표가 붙고, 타이머 기록으로 역량이 판가름나는 냉정하고 치열한 곳이다. 영화는 '수영'이란 사회의 축소판을 통해 그 속에서 즐기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아이들의 비명을 길어올려 시스템을 겨냥한다. 

 

 

각본은 16년전 빼어난 수영 실력을 겸비한 고등학생 국가대표였던 광수의 시점에서, 그리고 그저 수영하는 것이 즐거운 천진한 열 두 살 준호의 시점에서 한 번씩 전개된다. 영화가 먼저 풀어내는 건 흑백으로 입혀진 광수의 과거다. 타고난 천재 광수는 수영보다 노름과 술이 더 좋은 나머지, 국가대표 소집에 늦게 되고, 그로 인해 코치로부터 가혹한 체벌을 받게 된다.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 광수는 국가대표 포기 선언을 한 채, 안면 있던 스포츠 기자에게 코치의 학대를 고발하지만, 이는 기자의 만류로 세상에 공표되지 못한 채 무마된다. 

이후 카메라가 비추는 건 16년 뒤, 광수와 묘하게 닮아있는 준호다. 만년 4등 준호는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1등으로 만들어준다는 코치 광수에게 강습을 받게 된다. 초반엔 낮은 등수로 준호를 폄하하던 광수는 그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한다. 이때 관객석을 경악시키는 건, 과거 본인이 지독히도 혐오했던 스승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채 아이를 무자비하게 체벌하는 광수의 모습이다. 엄마는 아이의 상흔을 발견하지만 1등 타이틀을 위해 이내 침묵하고, 결국 준호는 가혹한 훈련의 결과로 1등 기록과 엇비슷한 2등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더 이상의 학대를 견딜 수 없던 준호는 광수와 갈등을 빚게 되고, 이후 광수의 첨언대로 부모의 간섭과 강습 없이 스스로 대회에 출전하고 만다. 이후 영화는 결국 1등을 점한 준호의 엷은 미소를 비추며 맺는다. 

 

 

영화의 줄거리는 준호가 광수를 만나게 되며 겪게 되는 과정에 초점을 두어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 극에서 준호의 서사 못지 않게 중요한 지점은 광수의 과거에 대한 플래시백이다. 지난 날의 광수, 오늘날의 준호가 바로 그 허우적대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광수의 서사를 준호의 서사로 단순히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훈련소', '국가대표'라는 상황과 인물의 특수성 내에서 국한될 수 있는 문제를 사회 전반으로 끌고 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오히려 아이들을 더 옥죄는 환경의 가학성에 대해 밀도있게 그려낸다. 예컨대 과거의 피해자였던 광수가 현재의 가해자로 전복된 아이러니와 부모의 과도한 집착과 섣부른 욕심이 부른 아이의 트라우마가 그렇다. 더 나아가 건장한 체격의 고등학생 광수가 겪어야 했을 폭력이 왜소하고 마른 초등학생 준호의 몸에 대물림되는 현장은 그 심각성을 부각한다.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광수 못지 않게, 아이를 한계까지 몰고 가는 데 가담하는 또다른 인물은 서글프게도 친모다. 그는 아픈 아이의 컨디션보다 그로 인해 강습에 결석하게 되는 것이 걱정인 사람이고, 당장의 상처들은 메달로 덮을 수 있을 거라 맹신하는 사람이다. 원치도 않은 것들을 강제로 밀어붙이던 그는 중단 선언을 한 아이를 면전에 두고는 본인의 헌신을 담보로 포기할 권리마저 박탈한다.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동안, 준호의 존재는 소거되어 있다. 회사도, 학교도 아닌 가정에서마저 성적에 대한 강박에 시달린 채, 부모의 욕망을 오롯이 소화해야 했을 준호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한편, 영화엔 2차 가해의 문제도 여실히 자리해 있다. 과거 광수가 국가대표 자격까지 내놓으며 선택한 건, (어른들로부터) 인권이 유린된 현장의 고발과 존엄의 회복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그 용기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피해자의 부덕을 의심하는 어른의 반응이다. 이 실언을 했던 기자는 본인의 일이 되어서야 태도를 바꾼다. 아들의 체벌 흔적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발끈해 코치를 찾아간 그는 과거 본인은 묵인하고 동조했던, 폭력에 대해 따져 묻는다. 이는 방관과 은폐가 지속되는 한, 결코 도려낼 수 없는 폭력의 뿌리에 대해 은유하는 것이며, 누군가가 겪을 수 있는 문제는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문제일 수 있음을 전하려는 영화의 호소이자 일갈로도 읽힌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결코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가 아니다. 오늘날 성과 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고질적인 문제들을 낱낱이 드러내는 서늘한 현실 공포물에 가깝다. 광수에게 어긋난 방식을 학습한 준호가 동일하게 동생을 훈계하는 시퀀스라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수영복 차림으로 뛰쳐 나온 준호를 광수가 추격하는 시퀀스는 특히나 공포스럽다. 준호가 짊어져야 할 욕망의 크기는 그의 키를 훌쩍 넘어서지만, 그 상황 자체가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자는 스크린 너머 현실의 기형성 같은 것을 감지해보게 된다.

 정렬된 트랙과 군중에 휩싸여 작고 희미하게 보이는 광수의 존재는 레인이 흐트러진 수영장에서 자유로이 유영할 때 가장 크고 또렷하게 변모한다.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의 이면에 드리운 어른들의 야망과 어두운 사회의 그림자를 들춰 정작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반문하는 영화 '4등'이었다.

 

Copyright ⓒ 메디먼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