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이선균의 얼굴은 다양하다. 드라마 ‘하얀거탑’과 ‘커피 프린스 1호점’, ‘나의 아저씨’와 같은 따뜻한 인상의 정직한 얼굴이 있고, 드라마 ‘파스타’나 영화 ‘끝까지 간다’, ‘성난 변호사’와 같은 짜증 덩어리가 있다. 덕분에 한동안 이선균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짜증이었다. 영화 ‘기생충’ 이후에는 성공한 재벌의 이미지가 있었다. 드라마 ‘법쩐’에선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로 나온다. ‘악인전’에선 얼굴만 봐도 곁에 다가가기 싫은 악인이기도 했다.
이선균은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캐릭터 변주를 해왔다. 굳이 예능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고도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내며 관객과 소통했다. 어쩌면 수많은 배우가 꿈꾸는, 작품 활동만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선순환이다. 연기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몇 안 되는 배우만이 가진 혜택이다. 오랫동안 좋은 작품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선균도 오랫동안 선순환을 이어왔다.
이제까지는 기존 이미지의 틀 안에서 변주했다면 신작 ‘킬링 로맨스’에서는 파격적인 변신을 보인다. 콸라섬에서 부를 축적해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대규모 테마파크를 지으려는 ‘조나단 나’(이하 ‘존 나’)다. 태권도복을 비롯한 독특한 착장에 큼지막한 콧수염, 5:5 가르마에 긴 뒷머리, 작은 것에도 이상하게 과장된 제스처까지, 이선균이 만든 ‘존 나’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귀여움을 유지하다가도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 같은 무서운 눈을 쏘아댄다. 요즘 말로 ‘맑은 눈의 광인’, 줄여서 ‘맑눈광’이다.
그런 가운데 이선균이 한류타임스와 지난 12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초 이 영화에 참여할 계획이 없었던 이선균은 미국에서 이하늬와 의기투합하며 전격 결정했다. 배우에게 있어서 큰 도전일 수 있는 이번 작품에서 이선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했다고 전했다.
‘킬링 로맨스’를 어떻게 만났을까. 처음엔 왠지 엄청 당혹스러웠을 것 같다.
개인적으론 대본을 재밌게는 봤다. 하지만 나를 왜 선택했는지 이유는 못 찾았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가야 했었는데, 출국 전에 만났었다. 결정할 생각은 아니었다. 뭘 원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하늬가 이걸 한다고 들었다. 이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이하늬를 만났다. 서로 ‘진짜 할 거야?’라고 확인했다.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상 받은 이후 주가가 더 올랐는데, 어떻게 왜 이 작품을 결정했는지 의문이다.
그렇게 큰 고민은 아니었다. ‘기생충’이 엄청난 후광을 얻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대본도 독특하면서 재밌었고, 이원석 감독님이라면 충분히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극의 서사는 하늬와 명이가 했다. 저는 캐릭터에 집중해서 어떻게 놀까만 고민하면 됐다. 결정하고 나니까 쉬웠다.
만화적이라서 그런지 ‘존 나’가 더 무섭고 악랄하게 전달됐다. ‘존 나’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악역이라고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만화적이고 귀여운 캐릭터였다. 거기에 간간이 광기를 보인다. 감독님께서 저의 어둡고 깊은 면을 바꾸려 했다.
사실 ‘존 나’는 뭘해도 되는 캐릭터다. 개연성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껏 표현했다. 감독님도 재밌는 사람이다. 대본대로 했다기 보다 대본 안에서 재밌게 놀았다.
그래도 이 인물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어떤 역할이든 그 캐릭터가 붙는 시간이 있다. 적응해 나가는 기간이 필요하다. 머리를 한 달정도 붙이고 다녔다. 주위에서는 다 웃고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과감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스틸컷 자체가 이렇게 화제가 된 작품도 흔치 않다. 주위 반응이 뜨거웠을 것 같다.
포스터와 스틸을 한동안 소장하고 있었다. 개봉이 미뤄지면서,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 주위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보여줬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정말 궁금해 했다.
어쩌면 ‘킬링 로맨스’는 이선균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짤’로 많이 소비했으면 좋겠다. 태권도복 외에도 재밌는 장면이 많다. 많이 퍼갔으면 한다. 저는 그간 안 보여드렸던 캐릭터를 표현했다는 것에 만족감이 크다. 독특하고 엉뚱한 영화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호불호가 심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캐릭터와 전개 방식에 의구심이 있을 텐데, 초반만 넘기면 재밌게 보실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영화 다양성에 대한 사명의식이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이원석 감독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를 재밌게 봤다. 그 대본도 상당히 엉뚱했었다. 이 감독님이 연출하면 ‘남자사용설명서’ 이상의 뭔가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
투자는 어떻게 받았는지?
저도 잘 모른다. 투자 여부가 결정된 다음에 들어갔다.
그래도 강인한 성격으로 알려졌는데, 연기하면서 이른바 ‘현자 타임’을 겪지는 않았을지 궁금하다.
후회는 없다. 한다고 하면 몰입해서 잘 한다. 즐기려고 했던 것 같다. 딴 작품에 비해서 캐릭터만 생각해서 했다. 서사는 명이랑 하늬가 잘 쌓아줬다. 밸런스를 잘 잡았다. 사실 ‘SNL’에서 섭외가 많이 왔었다. 계속 거절했다. 왜냐면 ‘킬링 로맨스’가 나올 예정이었어서. 굳이 또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H.O.T.의 ‘행복’을 정말 많이 부른다. 후반부에는 지긋지긋했다.
영화 찍을 때는 못 느꼈는데, 영화 보면서 행복이란 단어가 폭력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저는 ‘행복’이란 노래가 존 나의 인생곡으로 생각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생활할 때 위로가 된 노래가 ‘행복’이었던 거다. 일종의 주문이고 다짐이다. ‘여래이즘’과 1대 다수로 싸울 때 마지막 존 나를 막아주는 방패다.
마지막 곡은 성악처럼 부른다.
애드리브였다. 존 나의 위기 때 나온 진심처럼 보이려 했다. 목에 핏줄이 나와서 팽팽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이동 중에 차에서 정말 많이 불렀다. 매니저는 아마 힘들었을 거다.
혹시 ‘존 나’와 비슷한 점이 있을까?
연기란 게 어찌 됐든 제 호흡으로 하는 거다. 매번 다른 역할이지만 그 인물을 구현해낼 때 제 안의 무엇과 접점을 만들어가는 게 연기다.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저의 어떤 면을 인물에 끌고 가는데, 존 나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까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자유로웠다. ‘얘는 이래도 돼’라는 생각과 ‘이게 맞을까?’가 공존하긴 했다. 그래도 허용범위를 많이 넓혔다.
‘나의 아저씨’ 박동훈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변주를 줘서 놀랄 사람들도 있었겠다.
사실 박동훈 같은 역할은 황송하다. 정말 고마운 역할이긴 한데, 그걸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존 나를 하게 된 계기도 꼭 변신을 하겠다고 아니었지만, 기존의 사랑받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변주를 해보고 싶었다.
예능이나 특별한 사연 없이 작품만으로 계속 변신을 해가고 있다. 그런 선순환이 흔치는 않은데 이선균에겐 그런 패턴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감사한 말이고 감사한 일이다. 배우의 큰 장점이고 재미인 것 같다. 제가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고 갖고 오는 게 아니다. 역할과 대본 안에서 운용하는 거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을 극복해 내면 저한테 들어오는 파이가 넓어지기도 한다. 보람이라면 보람이고 성취감도 있다. 또 다른 걸 제 것으로 만들어가는 맛도 있다.
‘행복의 나라’, ‘잠’, ‘탈출:PROJECT SILENCE’이 아직 미개봉으로 남아 있다.
아마 올해 안에 다 개봉할 것 같다. 세 작품 모두 칸에 가는 걸로 알고 있다. 저에겐 다 의미 있는 작품이다. 개봉 시기만 잘 맞으면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흥행타율이 상당히 좋다. 작품을 보는 선구안을 키운 비결은?
대본이 쑥쑥 잘 넘어가고, 개연성이 있으면 선택하는 것 같다. 이번 작품만 특이하게 독특해서 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을 믿고 꼭 대본을 안 보고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아저씨’가 그랬다.
대본이 마음에 안 들땐 어떻게 거절하나.
솔직하게 말한다. 이건 좋은데 이건 내키지 않는다. 명확하게 한다. 그게 또 예의일 수 있다. 정말 친할 경우에는 직접 말하고, 그러지 않으면 사무실을 통한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피드백을 줘야 한다. 그래야 다른 분들을 캐스팅 하니까.
자연인 이선균에게 행복이란?
일상의 행복이다. 가족이 건강하고 무탈하고, 큰 일없이 영화를 계속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과 밥과 술을 마음 편히 먹는 것 정도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함상범 기자 kchsb@hanryu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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