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감독의 영화 ‘남자사용설명서’는 국내에서 대표되는 ‘B급 영화’다. B급 영화는 거시적인 메시지 대신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곤 한다. 그 감성을 잘 살린 영화로 ‘킬빌’ 시리즈, ‘데드폴’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남자사용설명서’는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잘 만든 B급 영화다. 이후 이 감독은 ‘상의원’을 연출했지만,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을 내세운 새 영화를 연출했다. ‘킬링 로맨스’다.
영화가 공개되면 극단적인 호불호 반응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시사회가 진행된 후 취재진 사이에서 ‘킬링 로맨스’가 화두로 올라오면 ‘호파’와 ‘불호파’가 선명히 나뉜다. ‘불호파’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며 몸을 부르르 떨고, ‘호파’는 시종일관 재밌다며 행복해한다. 성적과 무관하게 국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문제작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배우이자 톱스타인 ‘여래’(이하늬 분)는 연기력이 엉망이다. 광고 요정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교과서를 읽는 듯한 발연기로 대중의 뭇매를 맞는다. 대중의 악성 댓글에 괴로움을 느낀 여래는 한국인이 없는 콸라섬으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한국계 부동산 재벌 ‘조나단 나’(이선균 분)와 사랑에 빠진다. 7년 간의 결혼 생활 중 조나단 나의 사업 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린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여래의 삶은 인형에 불과하다. 먹을 것도 마음껏 먹지 못하고, 동선도 통제돼 있다. 불편을 호소하지도 못한다.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에 노출돼 있다. 조나단 나의 트로피에 불과하다. 그런 여래에게 다시 연기할 기회가 온다. 새 뮤지컬 영화의 주인공이다. 자아를 찾고 싶은 여래는 남편에게 연기하고 싶다고 하지만, 조나단 나는 단번에 거절한다. 인형처럼 살며 행복을 느끼라고 강요한다.
그러던 중 옆집에 사는 4수생 ‘범우’(공명 분)를 만난다. 범우는 여래의 팬클럽 3기생이다. 여래를 열렬히 사랑하는 존재다. 여래는 범우에게 자신의 처지를 밝힌다. 여래와 범우는 조나단 나를 죽일 계획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자아를 찾고 싶은 여래는 조나단 나가 만든 아름다운 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영화의 매력은 신선함에 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색감, 미장센, 연출 스타일을 맛볼 수 있다. 그 맛이 과연 취향에 맞을지는 먹어봐야 안다. 오마주인지, 베겨쓰기인지 정의하기 어렵지만 꽤 많은 작품의 레퍼런스가 담겨 있다. ‘부다페스트 호텔’의 만화적인 이미지로 시작하는 ‘킬링 로맨스’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클리셰와 애니메이션 유튜브 광고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오묘하게 섞여 있다. 스릴러나 공포의 느낌도 존재한다. 너무 많이 섞여 오히려 완벽히 독창적인 작품이 됐다. 오직 이원석 감독만이 시도할 수 있는 연출이다.
코미디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오밀조밀 흘러가는 이야기 사이에 시츄에이션 유머를 비롯해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한 코미디, 슬랩스틱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웃음을 이끈다. 상상 이상의 변신을 감행한 이선균은 물론 이하늬와 공명도 코미디 연기를 펼친다. 뿐만아니라 소품이나 조연도 상당히 색다르다. 일부 인물은 ‘장기하와 얼굴들’을 연상시키며, 대사가 거의 없이 행동만으로 연기하는 흑인 배우도 흥미롭다.
H.O.T의 ‘행복’은 지겹게 반복된다. 조나단 나의 입을 통해서다. 90년대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이 노래가 2시간 사이에 다섯 번 이상 반복된다. 지겨울 때쯤이면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래도 여러 번 노래를 부른다. 매우 뜬금없게 부를 때도 있다. 감독의 세밀한 계산 안에서 나오는 음악이다. 메시지와 유머를 동시에 잡는 영민함도 돋보인다.
연출적인 면에서는 호기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너무 생소한 터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긴 어렵겠지만, 소수의 마니아층은 확실히 확보할 것이라 예상된다. 극장 영화가 아니라 유튜브나 작은 플랫폼에서 규모가 작은 형태로 만들었다면 엄청난 반향을 이끌었을 작품이다. 하지만 극장판 영화로는 아쉬운 점이 있다.
문제는 이야기다. 작품의 화자인 여래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크다. 자아를 찾고 싶은 여래로 나오지만, 그 이유에 근거를 대지 못한다. 돈 많은 남편 덕에 편히 사는 존재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관객에게 여래를 응원할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
‘발연기’로 연예계를 떠난 여래가 단지 감옥 같은 집을 떠나 작품을 하겠다는 건, 그를 지지할 이유로는 부족하다. 내면의 성숙, 연기에 대한 간절함, 새로운 능력 등 성장한 점이 없다. 여래는 범우에게 의존만 하는 소극적인 여성에 불과하다. 오히려 조력자인 범우가 너무 많은 롤을 가져간다. 후반부에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희미해진다.
그러다 엉뚱한 존재가 작품 내에 있는 갈등을 해결한다. 그 존재가 등장하고 해결되는 모든 과정에 개연성은 망가져 있다. 상상을 넘어서는 엔딩으로 인해 연출자의 의도를 쉽게 해석하긴 힘들다. ‘세상이 가진 강요를 이겨내고 자아를 찾아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듯 보이지만, 직관적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B급 영화’도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야 의미가 있다. 설정이나 장치는 개연성이 부족하더라도,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어느정도 맞아떨어져야 한다. 기본을 경시하고, 지나치게 자신의 연출 스타일에 매몰됐던 건 아닌가 싶다. 이야기의 뼈대를 조금 더 잘 세웠다면, ‘남자사용설명서’ 못지않은 희대의 B급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세계관은 매우 만화적인데, 입시 경쟁이나 가정 폭력과 같은 현실적인 갈등이 부각된다. 이 갈등이 그려지고 해소되는 과정이 덜 매끄럽다. 만화가 현실처럼 다가오니 오히려 더 불편함이 가중되는 측면도 있다. 현실성을 조금 더 뺐다면, 좋았을 법 하다.
이 영화를 쉽게 추천하긴 어렵다. 음식으로 치면 ‘삭힌 홍어’나 ‘취두부’에 가깝다. 대중적인 감수성을 가진 관객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평소 마니악하고 독특한 감성을 선호하는 관객만이 흥미롭게 관람 할 것 같다. tvN 백승룡 PD의 ‘미생물’, ‘쌉니다 천리마 마트’, 최근 ENA에서 방영한 ‘가우스 전자’와 그나마 결이 비슷하다. 물론 ‘킬링 로맨스’가 더 진한 맛이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예측은 틀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함상범 기자 kchsb@hanryu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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