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전시장 가운데에 포르쉐가 놓여 있었지요. 많은 사람이 이 작품 ‘In the Beginning’을 보고 놀랐을 것 같아요.
A 이 작품은 일종의 카무플라주 작업이니까요. 사실 어려운 질문이에요. 이 작업에는 꽤 복잡한 콘텍스트가 깔려 있고, 사람들이 놀라는 반응은 그 모든 콘텍스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반응이거든요. 예를 들면, 이 포르쉐는 일종의 욕망의 대상이고 지위의 상징이며 (기술과 디자인 면에서) 동시대적이지요. 그런 콘텍스트 안에서 포르쉐를 이해하고 다가가던 사람들은 결국 이 포르쉐의 최신형 전기차가 제 오토마톤 조각품인 모기의 좌대(plinth), 혹은 스테이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지요.(편집자 주 : 키아프 갤러리현대의 라이언 갠더의 솔로 부스 중앙에는 포르쉐의 타이칸이 놓여 있었고, 타이칸의 보닛 위에는 새끼 손톱만 한 크기의 모기 오토마톤이 주기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뒤페이지의 사진에서도 모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는 기업이 후원한 작품을 싫어하지만, 포르쉐에서 준 자동차를 이런 방식으로 쓸 때는 얘기가 달라지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정작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 아주 작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Q 당신의 쥐 연작이 생각나네요. 그것 역시 정말 작았고, 잘 보이지 않는 전시장 바닥에서 작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지요.
A 많은 예술이 시끄럽지요. 실제로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불이 들어오거나, 반짝이거나, 화려하거나 거대하지요. 우리의 주목을 갈구하고 쳐다봐달라고 고함을 치고 있는 모양새지요. 일상을 생각해봐요. 일상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뭔가를 말하는 사람을 종종 무시하지요. 그렇게 갈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Q 타이칸의 보닛에서 모기를 발견하는 관람객의 반응이 정말 다양했어요. 어떤 사람은 ‘이게 작품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저 모기를 손으로 때려잡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 보였고, 누군가는 금방 이해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죠.
A 그래서 어프로처빌리티(approachability), 접근 가능성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예술 작품에 접근할 때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아는 상태로 다가가게 되지요. 전 사람들이 그렇게 다가가는 동안 생각이 바뀌는 걸 가장 좋아해요. 접근하면서 점차 내가 잘못된 것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거나, 내가 처음에 생각한 그 대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번 작품에서 아름답게 전시된 타이칸을 보다가 ‘어? 내가 이 자동차가 아니라 다른 걸 봐야 하는 건가?’라고 깨닫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201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전시한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se,(The Invisible Pull)’라는 작품도 비슷한 개념을 차용한 것이지요. 아치형 창문이 있고 햇볕이 잘 드는 꽤 큰 갤러리의 공간을 텅 비워두고 6개의 팬을 통해 사람들을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는 공기의 흐름을 만든 작품이었죠. 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갤러리 안쪽으로 발을 옮겨보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지요.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것인가. 자연풍인가 아닌가? 그런데 라이언 갠더의 작품은 어디 있지? 전시가 끝난 건가? 무엇을 봐야 하지? 뭔가 들리나? 그러다 작품 캡션을 보고 깨닫게 됩니다. 소재란에 ‘바람’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바로 그런 순간을 너무도 사랑하지요. 저에게 예술 작품이란 텅 비어 있는 공간도 아니고, 심지어 그 공간을 채운 바람도 아닙니다. 제게 예술이란 전시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두리번거리다 바람이 전시의 소재라는 걸 깨닫는 때까지 관람객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Q 그런 순간이 특별히 소중한 이유는 뭘까요? 그러니까 이건 예술의 효용은 무엇인가와도 닿아 있는 질문이지요.
A 사실 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에 관심이 있는 건 아녜요. 오히려 나를 위해, 나에게 필요한 교훈을 기억하기 위해 작업을 하는 편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온갖 것들을 쌓아가며 살아요.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기면 더 큰 집을 사고 더 큰 차를 사지요. 개도 있어야겠고, 커다란 TV도 있어야 할 것 같고요. 그런 물질적인 소유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세요. 제 이번 작품 ‘In the Beginning’의 조각품을 사려면 포르쉐를 같이 사야 하지요. 상업적으로 보면 거의 자살에 가까운 결정이에요. 팔려고 만든 작업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 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입니다.
‘Two Hundred and Fifty Three Degrees below Every Kind of Zero’, 2023.
Q 당신이 ‘커머셜’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재밌어요. 10년 전쯤 〈아트 바젤〉에 반대하는 아티스트들에 대해 “만약 돼지를 팔고 싶다면 시장에 끌고 나가야 한다”라는 말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남겼지요. 그런데 막상 가장 상업적인 포르쉐랑 협업했다기에 와봤더니 타이칸을 모기 조각의 좌대로 썼어요. 정말 천재적이고 유쾌해요.
A 사실 포르쉐에서 저한테 컬래버레이션을 요청한 게 아니라 제가 작업을 하는 데 포르쉐를 한 대 쓰고 싶으니 좀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보통 아티스트들의 상업 컬래버레이션과는 전혀 다르죠. 보통은 아티스트랑 협업하면 차에 그림을 그리거나, 내장을 이미지로 장식한단 말이죠. 전 그런 건 이해할 수 없어요. 사실 포르쉐는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운 사물이라 굳이 뭔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거든요. 이 세계는 점차 어텐션 이코노미화가 되어가고 있어요. 얼마나 주목을 끄는지가 돈 그 자체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지고 있지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소셜미디어 업체들은 점점 더 중독적인 플랫폼과 콘텐츠를 설계하고 있고요. 많은 사람이 자유를 억압당하면 이를 쟁취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막상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발하지 않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화려한 인생들에 주의를 빼앗기며 시간을 낭비하지요. 나에게 주어진 주체성을 낭비하지요. 제 작품이 그런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Q 포르쉐의 유명 모델인 911이나 박스터가 아닌 타이칸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A 실은 저도 이 포르쉐 타이칸을 갖고 싶어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어서라거나 그런 삐뚤어진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정말로 이 타이칸이라는 전기차가 너무 쿨해서 갖고 싶어요. 포르쉐의 다른 모델을 제 나이에 사면 ‘중년의 위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타이칸은 달라요. 전기로 달리는 포르쉐는 중년의 위기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멋지지요. 이 모기 오토마톤 조각이 전기로 구동된다는 점도 고려했어요. 불교의 윤회 사상에 대한 패러디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개념적으로 이 모기는 계속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어요. 몸을 떨다가 배터리가 방전되면 움직이지 않고 죽지요. 그러니 사실은 ‘배터리가 충전된 시간만큼만 죽어가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한 셈이죠.
Q 지난 팬데믹 상황에서 마곡동의 ‘스페이스 케이’에서 열린 라이언 갠더 개인전을 위해 당신이 한국에 보낸 인터뷰 영상을 봤습니다. “예술이란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다른 점에서 끝나야 하고, 그 끝나는 각각의 점들은 관람자 나름의 해석이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A 전 예술에는 반드시 모호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이해는 결국 해석에 기대게 되는 것이고, 결국 해석은 그 예술이 놓인 문화와 역사적 맥락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 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어떠한 예술 작품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겠지요. 그것이 예술의 깊이를 가르는 차이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테디 베어’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예쁘게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것이 전달하는 것은 한정적이지요. 갖고 싶다는 감정이 들 수도 있고, 귀엽다는 감정이 들 수도 있고, 기쁨을 전달받을 수도 있겠죠. 그 한계 안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건 그림이 가진 전달 목적에 충실한 커뮤니케이션이지 예술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뭔가를 마주치면 불안하고 불편하다고 느끼죠.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차분해질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집 벽에 테디 베어 인형 그림을 걸어두지요. 수많은 작가가 테디 베어의 그림 같은 작업을 합니다. 물론 테디 베어를 보며 행복해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모험가라 안전함을 느끼기보다는 불편하고 불안한 가운데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작업을 좋아하지요. 제가 그런 작업을 하고 싶기도 하고요.
지난 9월 6일부터 열린 한국을 대표하는 아트 페어 KIAF에서 갤러리현대는 자신들의 부스 전체를 라이언 갠더의 솔로 부스로 꾸몄다.
Q 어디에 스크립트라도 숨겨놨나요? 어떻게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지요? 저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어요. 이번에도 전시된 당신의 작품 ‘Two Hundred and Fifty Three Degrees below Every Kind of Zero’(2023)의 ‘-253℃’는 어떻게 나온 숫자인가요? 절대영도는 -273℃ 잖아요.
A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을 만들 땐 지금 얘기한 헬륨이 어는 온도인 -273℃였어요. 이 작품은 에디션 넘버를 붙이지 않고 만들 때마다 273에서 숫자를 하나씩 낮췄지요. 제목이 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Q 또 궁금한 게 있어요. 당신이 만든 가짜 포스터 작품들 중 ‘TurboCapitalism’이라는 전시 제목이 붙은 게 있잖아요. 다른 작가들은 다 알겠는데, ‘Vivi Enkyo’는 누구인가요?
A 작가예요. 비비 엔쿄는 1960년대에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던 블루 콘셉추얼리스트 중 한 명이죠.
A 실은 다 거짓말이에요. 비비 엔쿄는 제 다른 아이덴티티 중 하나고, 백그라운드는 다 지어낸 얘기죠. 그 포스터 작업들은 집에 있는 서랍에서 돈을 꺼내듯이 하는 작업이에요. 제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전시 포스터를 만드는 것이죠. 너무 즐거워서 쉬는 날에 혼자 해요. 집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눈을 감아요. 그러고는 먼저 장소를 생각하죠. 예를 들면 파리에 있는 ‘팔레 드 도쿄’를 떠올려요. ‘만약 내가 팔레 드 도쿄의 큐레이터라면 어떤 전시를 기획할까?’ 가속화된 성장에 대한 전시를 만들어보자. 제목 나왔네. 제목은 ‘Turbo-Capitalism’으로 가자. 그러고는 그 전시의 주제에 어울리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떠올리죠. 이불이 떠오르고, 마크 레키가 떠오르죠. 그다음에는 큐레이터의 모자를 벗고 디자이너의 모자로 바꿔 쓰고 레이아웃을 잡아요. 어떤 건 정말 중학생이 그린 그림 같은 것도 있고, 어떤 건 정말 봐주기 힘든 것도 있는데, 그건 정말 미술관의 전시 포스터들 중에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특히 정부에 속한 기관 미술관의 포스터들이 그렇지요.
Q 이렇게 가짜 포스터만 만들 게 아니라 실제 전시를 큐레이팅해보면 어때요?
A 키아프에서 전시 중에 파리의 한 유명 큐레이터가 부스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제가 지금 포스터에 적은 여러 유명 미술관 중 하나에서 디렉터를 한 사람이죠. 이분이 포스터를 보고는 ‘허허’ 웃으시더니 제게 딱 한 마디를 남기더군요. “라이언 씨, 큐레이팅이 이렇게 쉬운 것 같지요?”라고요. 실제 큐레이팅은 정말 복잡한 작업이에요. 이건 어린아이의 역할극 같은 겁니다. 수배 가능한 작가와 작품의 리스트를 만들고 전시의 콘셉트에 맞게 큐레이팅하고 운송을 어레인지하고 실제 디스플레이를 설치하는 정말 힘든 과정은 다 빼버린 놀이지요.
Q 오늘 우리가 얘기하면서도 몇몇 단어가 계속 반복됐어요. 주체성(agency), 시간(time), 관심(attention)이라는 단어죠. 이는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가진 가장 값진 자산’이라고 말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대단한 성찰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건가요?
A 〈나의 빛을 가리지 말라(Stand out of Our Light)〉는 책을 쓴 제임스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까 얘기한 ‘어텐션 이코노미’에 관한 책이죠. 제임스 씨는 구글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회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인간성을 위협하는 알고리즘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퇴사한 인물이에요.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여러 기업들이 자신들의 플랫폼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 코딩을 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앗아가는 데 주목하고 있다고 얘기하며 이런 주목 경제 시대에 위협받는 주체성(agency)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이죠. 제가 스코틀랜드까지 가서 인터뷰한 적도 있을 만큼 그의 주장을 잘 알고 있어요. 그분의 책에 나오는 이론입니다. 언젠가 프린스턴대학교에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어요. 재밌게도 그날 저녁 바에 갔는데, 제임스 씨가 그곳에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주목 경제라는 개념이 좀 복잡한 것 같은데, 나의 어머니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라고요. 제임스 씨가 이렇게 물으라고 말하더군요. “인생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이 인스타그램만 하고 있을까요?”라고요.
A 아트 페어에서 종종 제 작품을 만납니다. 그럴 때면 “이것들을 잘 팔아치워서 이 사람들에게 줄 월급을 벌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Phantom Ambition (Turbo Capitalism)’, 2023.
EDITOR 박세회 PHOTOGRAPHER 김성룡 PHOTO 갤러리현대 ASSISTANT 송채연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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