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읽는 여성, 쓰는 여성

[미술로 보는 세상] 읽는 여성, 쓰는 여성

연합뉴스 2023-03-05 09:00:11 신고

3줄요약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읽는 일'은 특정 계급이나 희소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었기에, 그로부터 거리가 먼 여성이 무언가를 읽는 일은 드물었고, 읽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많지 않다.

프랑스 귀족문화를 꽃피운 로코코 시대,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섰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1721~1764)은 자신의 초상을 다수 그렸다.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가 그린 초상화(1755)를 보면 손에는 악보, 배경 소품으로는 책이 놓여 있다. 계몽주의에 천착한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선전화라고 할 수 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

루브르 박물관 소장

그로부터 얼마 후 로코코의 마지막 화가로 불리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가 1776년 눈에 확 띄는 그림을 한 점 그렸다. '책 읽는 소녀'다. 유명 인물이 아닌 상류층으로 보이는 한 소녀의 책 읽는 모습을 그려 여성의 주체적인 일상을 기록했다.

집중한 자세와 화려한 복장이 품위 있어 보이고, 등을 받친 쿠션은 안락감을 준다. 눈을 사로잡는 건 강렬한 노랑 드레스다.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리본도 매력적이며, 앙증맞아 보이는 책은 고급스럽다.

'책 읽는 소녀' '책 읽는 소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이 그림은 프라고나르의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남녀 사이의 희롱과 쾌활한 관능을 즐겨 그린 그였지만, 이 작품은 단아한 일상이다. 이채로운 다른 특징은 붓질이다. 얼핏 보면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기운이 엿보인다. 자세히 보면 거칠다. '인상주의의 맹아'라고 불릴 만하다.

시간이 지나, 러시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여성화가 마리 바시키르체프(1858~1884)가 1882년 그린 '책에서'라는 작품은 화려하지 않은 색조지만 대단히 강렬하다.

'책에서' '책에서'

하르키우 미술관 소장

책을 읽는 정면의 얼굴과 손의 자세, 헤어스타일에서 진지함과 집중력이 저절로 느껴진다. 검정 배경과 검정 옷이 금발의 머리와 어우러져 독서의 집중도를 한껏 높이고 있다.

머리에 손을 짚으며 열중한 모습이 내면에서 솟구치는 자의식의 표현으로 여겨지며, 시대에 대한 도전 같다. 이 그림을 보면 어찌 책을 읽고 싶지 않으랴!

한편 남존여비 사고가 뿌리 깊었던 조선에서의 여성 독서는 '불허'를 넘어 '금단'의 영역이었다. 조선 후기 윤덕희(1685~1766)가 그린 그림은 여자가 책을 읽는 장면을 담은 유일한 우리 그림이다.

무제 무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크기가 20cm×14.3cm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다. 책 읽는 여자의 모습을 지극히 보기 힘들었던 시대였고, 여성의 가사노동 강도가 절정에 달했던 조선 후기였으니, 화가는 '그리되 숨기고 싶어서' 작게 그린 것이었을까?

여인이 책 읽는 장소는 적막한 뒤뜰 같다. 편안한 복장으로 작은 평상에 앉아 웃음을 머금은 모습이 더는 평화롭기 어려워 보인다.

배경을 이루는 그림 속 그림에는 새와 꽃과 구름이 그려져 여인의 독서 삼매경을 한껏 북돋운다. 풍성한 자태를 자랑하는 파초도 눈에 띈다. 이 아늑한 만족감이란!

윤덕희의 고조부는 '어부사시사'(1651)로 유명한 남인의 거두 윤선도(1587~1671)이며, 부친은 눈부신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1668~1715)다.

유럽에서도, 조선에서도 독서는 귀족과 부르주아 남성이나 양반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됐으며, 특히 여성에게 책은 불온한 것이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2005) 저자 슈테판 볼만(1958~)은 "책을 읽으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독립적으로 되며, 독립적인 사람은 대열을 벗어나 적(敵)이 된다"고 말했다.

현대사회 사람들은 디지털 기기에 탐닉한다. 전자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패드나 휴대전화는 잠시 제쳐두고 독서를 통해 어떤 이의 '적'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읽는 일을 넘어 쓰는 일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때때로 거론되는 미국의 작가 폴 오스터(1947~)의 글을 인용한다. "글쓰기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것이며,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기분으로 행하는 육체적인 경험이다."

여기 한 여성이 쓰고 있다. 손과 펜과 공책이 하나가 된 듯 몰입해 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공(時空)이다. 미국의 토마스 폴락 안슈츠(1851~1912)의 '글 쓰는 여인'(1905)이다.

테이블에서 쓰는 여성 테이블에서 쓰는 여성

소더비

읽는 일은 물론이고 쓰는 일에서 오랫동안 배제된 '쓰는 여성'을 그린 매우 희귀한 그림이다.

'오만과 편견'(1813)의 저자인 제인 오스틴(1775~1817)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에서 가족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원고를 숨겨가며 써야만 했다.

영국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 '미들마치'(1872)를 쓴 조지 엘리엇(1819~1880)의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다. 논란을 피하고자 '조지'로 시작하는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19세기 후반까지 여성은 쓰기에서 차단돼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림 속 여인의 환경을 자세히 보니 '그녀만의 방'은 아닌 듯하다. 거실이나 주방의 한편일까? 그래서 그녀의 쓰는 행위가 더 소중하게 보인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대표 저서 '자기만의 방'(1929)에서 여성의 글쓰기는 자아에 눈뜨는 일이며, 이를 위해 '경제적 자립'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을 으레 '공간의 문제'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건 자신을 돌아보며 쓰기에 매진할 수 있는 '주체성'에 대한 담론이다.

울프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또는 남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의 주인이다."

그렇다. 쓴다는 건 '나'를 주인으로 만드는 일이다.

화가였던 울프의 언니 버네사 벨(1879~1961)이 책을 앞에 둔 울프의 모습을 그렸다.

'울프의 초상화' '울프의 초상화'

영국 초상화 박물관 소장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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