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㊴] 이무생의 팥죽, 상처가 상처를 보듬는 순간

[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㊴] 이무생의 팥죽, 상처가 상처를 보듬는 순간

데일리안 2022-08-04 07:28: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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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무생 ⓒ드라마하우스스튜디오 SLL 제공배우 이무생 ⓒ드라마하우스스튜디오 SLL 제공

괜히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배우에 국한해 보면, 만난 적도 없으면서 그 속을 본 적이 있는 것마냥 친근감이 이는 이가 있다.

아니 그냥이 아닐 것이다. 그가 맡은 캐릭터, 맡은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 그렇게 해서 인물에 묻어난 특성에서 '그'를 느끼고 '그'라고 생각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같은 캐릭터를 다른 배우가 맡았을 때 결과가 같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상상을 즐긴다.

캐릭터를 표현한 방식이든, 표현한 결과든, 결과에서 느껴진 어떤 특성이든, 그 합이든 '취향''에 맞기에 괜한 정을 느끼는 것일 텐데. 물론 그런 배우가 한 명은 아니지만, 최근엔 이무생이다.

처음 이무생이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는 배우로서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연기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무생과 같은 이름, 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겹치지 않을 수 있는 게 연예인의 활동명이다. 대배우 김무생이 떠난 1년 뒤 이무생은 영화 '방과 후 옥상'으로 늦은 데뷔를 했다.

무생, 실제 이름 한자가 무엇이든 이보다 배우에 걸맞은 이름이 있을까 싶다. 자신만의 생 없이 비어 있는 도화지 위에 다른 이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뜻으로도, 무수하게 많은 생들을 표현해 낸다는 의미로도 멋진 이름이다.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부부의 세계' 김윤기 역의 이무생. 첫 만남에 '심쿵'하게 하는 힘, 이무생로랑(명품 브랜드 입생로랑과 발음의 유사성, 드라마 내 유일의 명품 성격을 빗댄 별명) ⓒ출처=네이버 블로그 limhyunjeon

단역부터 시작해 악역 선역 가릴 것 없이 캐스팅이 우선인 무명배우의 이력을 쌓아가는 동안 제일 중요한 건 연기력을 인정받는 일이었을 터. 10년을 지나 무명으로 끝내지 않고 이름을 알리는 행운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나면, 알게 모르게 형성돼 온 배우의 이미지가 재탕되고 삼탕되는 시기가 온다. 연출와 작가가 그 이미지를 읽었고, 그 이미지로 쓰기 위해 캐스팅을 하고, 예상대로 그 어떤 배우보다 그 이미지의 배역을 잘 소화한다.

2020년 드라마 '부부의 세계' 이후 배우 이무생이 쓰임 받는 이미지는 다감하고 배려 깊은 남자다.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지선우의 절망과 고통을 '입안의 혀'처럼 조금도 거슬림 없이 그리고 조용히 보듬어 주는 동료 의사 김윤기, 지선우 고통의 원흉인 이태오(박해준 분)를 저지하고 차단할 때면 차가운 카리스마가 발산되던 남자 김윤기. 이보다 완벽한 남자는 발견하기 힘들다.

'서른, 아홉' 김진석 역의 이무생. 사랑하는 이가 시한부임을 알게 됐을 때, 그 깨어지고 무너짐 '붕괴'. 도통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는 눈물 ⓒ출처=네이버 블로그 keepgoing27

지난 봄에는 드라마 '서른, 아홉''에서 시한부 정찬영(전미도 분)을 끝까지 지키는 순애보를 간직한 김진석으로 분했다. 처음엔 찬영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유부남으로 등장했는데, 이무생이 맡다 보니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불렀다. 이무생에게 이 역을 맡긴 이유일 것이다.

역시나. 찬영과 진석은 서로 사랑했고, 진석은 기억에 없으나 자신과의 하룻밤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여성과 결혼한 것이었다. 결혼의 이유가 무책임으로 인한 사회적 망신 예방보다는 '아이'는 대우 받아야 하는 세상의 존재라는 무게에 있음이 드라마 중반 드러난다. 아이는 진석의 소생이 아니었으나, 아들로 키운 아이의 DNA를 따지지 않고 진석은 울타리를 자처했다.

진석은 그런 사람이고, 찬영은 그래서 진석을 놓을 수 없다.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하고 인연을 이어가면서도 사회가 정한 '선'은 넘지 않고 마음을 유지해 왔지만, 세상은 저간의 사정을 읽어줄 생각 없이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다소 우유부단해 사랑을 방치했던 진석이 찬영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안 뒤 돌변한다. 자신을 밀어내고, 떠날 자신 대신 남을 가족 곁으로 돌려보내려 하는 찬영의 결심을 되돌리던 공원 벤치에서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순수함, 순수한 사랑의 극치가 두 눈망울에 가득했다.

'클리닝 업' 이영신 역의 이무생. 젠틀맨의 미소, 나의 키다리 아저씨 ⓒ출처=네이버 블로그 chesungmin

지난달 24일 종영한 '클리닝 업'에서 이무생이 맡은 배역은 주가조작 작전팀의 일원인 변호사 이영신이다. 분명 불법적 일을 하고 있는데 밉지 않았던 것은 염정아가 연기한 어용미를 음으로 양으로 돕고 아끼는 모습 때문이었다.

사무실을 활보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환경미화원의 특성을 이용해 내부자거래로 시작해 주가조작까지 '간 크게' 가담하는 어용미가 '인간의 선'을 지켜 세상 밖으로 나가지는 않도록 수문장 역할을 하는 이영신. 어용미의 도덕적 양심을 일깨우고 결국은 함께 불법의 세계에서 발을 털고 나오게 하는 역할이 배우 이무생에게 맡겨졌다.

사실 어용미는 웬만해선 사랑하기 어려울 만큼 대책 없이 일을 벌리고,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고, 불법과 편법을 밥 먹듯 한다. 아이들을 위한 가난 탈출에 모든 것을 건 모성이 방패로 내세워지기도 하고,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잔정으로 반전을 시도하지만 역부족이다. 하지만 이영신이 발견해 주는 어용미의 인간적 모습, 이영신이 발견해 주는 어용미의 여성미는 어용미를 사랑하기에 충분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아껴주는 면모가 이영신을 한없이 따뜻한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이태오에게는 단호하지만 본래는 한없이 다정한 김윤기, 두 여자 울리는 바람둥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게 중요한 김진석, 아버지를 잃고 돈을 목적으로 살다 본래의 결대로 사랑을 회복한 이영신. 두 가지 모습을 함께 지녔지만, 시청자로 하여금 '본래의 모습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하는 캐릭터들이 배우 이무생에게로 향하고 있다.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묵직하게 여자를 아끼는 남자로서의 모습이 캐릭터의 매력을 더하는 건 물론이다.

"아직도 나에게 팥죽은 쓰러진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나를 마주하는 의식 같은 거예요" ⓒ"아직도 나에게 팥죽은 쓰러진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나를 마주하는 의식 같은 거예요" ⓒ

남을 위해 많은 걸 혹은 모든 걸 내주는 이 남자는 자신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하는 걸까. 친근함을 느끼다 보니 친구 혹은 아는 동생 생각하듯 엉뚱한 걱정을 했다. 그 염려가 또 엉뚱하게 '클리닝 업' 14회의 한 장면에서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그에게는 소울 푸드가 있다. 팥죽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코 가벼운 장면도 아닌데, 이무생은 이 장면에 무게감을 드리울 줄 아는 배우다. 그 무게감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이영신의 외로움을 토닥이는 것을 넘어 이무생의 상처를 보듬는 것으로 확장되는 상상을 허할 만큼이다.

어용미가 묻는다. 이영신 씨 같이 능력 있는 사람이 왜 내부자 거래에 뛰어들었어요? 내가 아는 이영신 씨는 그런 일 할 사람 아닐 거 같은데. 이영신은 답한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가난하셨어요. 근데 성실하다고 가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10년간 모은 쌈짓돈으로 팥죽집을 여셨고 이름을 '영신 네'로 지으셨어요. 당신 아들 이름을 내건 현판 앞에서 어찌나 행복해하셨는지. 그 지역 재개발 공사로 팥죽집을 연 지 9개월 만에 턱없는 보상금을 받고 쫓겨났어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시위도 해보고 공무원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도 해봤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아직도 나에게 팥죽은 쓰러진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나를 마주하는 의식 같은 거예요. 그때 생각했죠. 가난은 시스템 안에서 해충이고 구제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아픈 상처, 초라했던 시작을 마주하는 용기. 단단한 부드러움, 이질적 요소의 동거가 가능한 배우 이무생 ⓒ에일리언컴퍼니 제공아픈 상처, 초라했던 시작을 마주하는 용기. 단단한 부드러움, 이질적 요소의 동거가 가능한 배우 이무생 ⓒ에일리언컴퍼니 제공

정말이지 엉뚱하게도, "아직도 나에게 팥죽은 쓰러진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나를 마주하는 의식 같은 거예요"라는 말에 꽂혔다. 이 말을 하는 이영신, 아니 이무생의 표정에서 힐링을 느꼈다.

잘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종종 아픈 과거를 마주하는 일을 두려워한다. 두렵지 않아도 굳이 자청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영신은 아버지를 죽음과 깊이 연관된 팥죽집과 팥죽을 피하지 않는다. 되레 힘든 일이 있으면 팥죽집에 가고,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팥죽집에서 만나, 팥죽을 먹는다. 쓰러진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어린 나,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할 힘이 없던 나, 변화의 시작점을 계속 상기한다. 거기서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개선의 희망을 품는 이영신의 힘이 나온다.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선'을 넘지 않을 용기가 나온다.

이 듬직한 이미지와 다감한 인성을 온몸에 두루감고 동굴 목소리에 저장하고 올곧아 보이는 눈빛에 담은 배우 이무생. 당분간은 계속, 혼자 친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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