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반도체 수출과 세수를 늘리는 동시에 정부의 자금 조달비용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데이터센터 건설에 나선 빅테크가 장기채 발행을 늘리면 국채와 투자자 자금을 놓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13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 ‘총재와의 대화: AI 상승 사이클과 중동 분쟁이 맞물린 상황에서 한국 통화정책의 과제’에서 이러한 경로를 설명했다. 한국 재정의 관건은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가 얼마나 지속되고, 금리 상승이 국채 이자 지출에 언제 반영되느냐다.
▲장기채 공급과 금리위험
신 총재는 AI 투자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며 대형 클라우드 기업의 초장기 회사채 발행을 언급했다. 투자 확대에 필요한 자금을 채권시장에서 조달하면서 다른 발행자의 조달 여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발행액이 상대적으로 작더라도 듀레이션을 기준으로 보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듀레이션은 채권 가격의 금리 민감도를 나타낸다. 발행액이 같아도 듀레이션이 길면 투자자가 부담하는 금리위험은 커진다. 장기채 공급이 증가할 때 투자자의 매입 수요와 위험 부담 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요구수익률이 높아질 수 있다. 국채 발행금리에도 상승 압력이 가해지는 경로다. 반도체 주문을 늘린 AI 투자가 정부의 이자 지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장기금리 상승의 원인은 구분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에 대한 기대가 중립금리를 높이는 경우와 장기채 공급·불확실성 증가로 기간 프리미엄이 오르는 경우는 다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 9월 보고서에서 AI에 따른 균형금리 변화 가능성, 빅테크 채권 발행, 재정 우려를 장기금리의 영향 요인으로 제시했다. 금리가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생산성 개선을 판단하면 채권 수급과 재정 위험을 놓치게 된다.
▲수출 증가와 생산성의 차이
정부채무 부담을 판단할 때는 금리와 성장률을 함께 봐야 한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정부채무의 평균 조달금리가 명목 경제성장률보다 높을수록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에 상승 압력이 생긴다. 정부 수입에서 이자를 제외한 지출을 뺀 기초재정수지도 영향을 준다. AI 투자로 금리가 오르더라도 성장과 세수 증가가 이를 상쇄하면 재정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 IMF가 채무 지속가능성을 평가할 때 성장률·금리·기초재정수지·부채 규모를 함께 검토하는 이유다.
기술 도입 속도에 따라 국가별 부담도 달라질 수 있다. IMF가 지난 8월 발간한 연구논문 ‘AI와 아시아의 경제적 격차 확대(AI and Economic Divergence in Asia)’는 AI 선도국의 자본 수요 증가가 세계 금리를 높여 후발국의 투자를 제약하는 경로를 모형으로 제시했다. 선도국은 생산성 향상으로 높아진 조달비용을 감당하지만, 후발국은 생산성 개선에 필요한 투자부터 제약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한 모형 결과다. 핵심은 금리 상승이 국가별 생산성 개선보다 먼저 전달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 AI 공급망에 참여해 반도체 수출과 세수 증가의 혜택을 얻는다. 그러나 해외 데이터센터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것과 국내 기업이 AI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수출은 해외 주문과 제품 가격에, 국내 생산성은 기술 도입과 업무 개선에 영향을 받는다. BIS 연구진도 AI 투자의 무역·자산시장 효과와 비교해 생산성 개선의 규모와 확산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균등하다고 지적했다. 수출 증가만으로 국내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세입과 이자 지출의 시차
신 총재는 AI 투자와 수출 증가가 한국 정부의 세수 확대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높은 이자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계와 소기업에는 재정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재정 운용에서는 두 흐름이 엇갈릴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반도체 업황이 악화하면 관련 세입은 줄어드는 반면, 기업과 가계에 대한 지원 수요는 커질 수 있다. 호황기의 세수 증가를 지속적인 재정 여력으로 판단하기 전에 경기 변동에 따른 영향을 구분해야 한다.
국채 이자 지출에는 별도의 시차가 있다. 시장금리가 올라도 이미 발행한 고정금리 국채의 이자는 즉시 바뀌지 않는다. 금리 상승은 신규 발행과 만기 도래 채무의 차환을 거쳐 이자 지출에 반영된다. 세수도 기업 실적이 발생한 시점과 신고·납부 시점이 다르다. 당해 연도 세수와 이자 지출만 비교하면 이후의 부담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반도체 수익성이 낮아지는 시기에 높은 금리로 국채를 차환하는 경우도 재정 전망에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추가 세수를 지출 재원으로 활용할 때는 업황에 따른 일시적 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따른 지속적인 증가를 나눠야 한다. 일시적 세입으로 계속사업을 확대하면 업황이 꺾인 뒤에도 지출 의무는 남는다. 국내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투자는 성장률과 세입 기반을 함께 개선할 수 있다. AI 호황으로 확보한 세수를 특정 산업의 경기 변동에 덜 의존하는 재정 기반으로 연결하는 것이 과제다.
신현송 총재는 “장기금리 상승은 생산성 향상에 따른 자연이자율 상승 때문일 수도 있고, 재정 규율의 약화 때문일 수도 있다”며 “국가별로 재정정책의 규율 차이가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