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오페라 가수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동하던 바리톤 이대범(49)의 인생은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오른쪽 편마비와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게 됐고, 한동안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노래는 그의 곁에 남았다. 말하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노래를 이어간 이대범은 다시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아내 이소연(45) 씨는 남편이 노래할 수 있도록 직접 1인 기획사를 세웠다. 두 사람은 이제 거창한 성공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대를 찾아가며 새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밀라노에서 시작된 꿈, 한순간에 달라진 삶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이대범은 오스트리아 빈시립 음악예술대학과 이탈리아 밀라노 시립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던 시기였다.
아내 소연 씨와의 인연도 유학 시절 시작됐다. 외국어고등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소연 씨는 러시아에서 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 글로벌 기업 모스크바 법인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만나 가정을 꾸렸고 밀라노에 정착했다.
아들 태리(11)를 낳은 뒤에도 가족의 생활은 이대범의 음악 활동을 따라 이어졌다. 더 큰 무대와 더 많은 기회를 바라보며 앞을 향해 달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6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면서 가족의 삶도 크게 흔들렸다.
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던 소연 씨와 어린 아들은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대범은 밀라노에 남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중 급성 뇌경색이 찾아왔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뇌 손상이 컸고, 이후 오른쪽 편마비와 심각한 언어 장애가 남았다.
■말보다 먼저 돌아온 노래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가족이 마주한 현실은 이전과 달랐다. 이대범은 오른손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려웠고 일상적인 대화도 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워 단어를 나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래는 이어졌다.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다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대범에게 새로운 목표가 됐다.
예전처럼 악보를 보고 가사를 곧바로 익히는 일도 쉽지 않다. 한 곡을 준비하려면 반복해서 듣고 수없이 따라 불러야 한다. 노래를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그럼에도 이대범에게 연습은 포기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방식이 됐다.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기량을 그대로 되찾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노래를 계속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남편의 무대를 위해 기획사가 된 아내
이대범의 곁에는 아내 소연 씨가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는 일까지 맡은 소연 씨는 남편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직접 1인 기획사를 설립했다.
이후 소연 씨는 남편의 매니저이자 통역사로 함께 움직이고 있다. 공연을 준비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일부터 현장에서 필요한 역할까지 직접 맡는다. 대범 씨가 혼자 해내기 어려운 일을 곁에서 돕는 동시에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두 사람의 행보는 조금씩 공연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산불로 피해를 입은 청도 주민들을 위한 음악회에 참여했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다문화 학생 관련 행사에서도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기획사를 세운 뒤에는 직접 기획한 공연도 마련했다.
화려했던 오페라 무대와 비교하면 규모는 크지 않다. 하지만 이대범에게는 무대의 크기보다 다시 관객 앞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이들과 걷는 아버지의 시간
남양주에서 보내는 가족의 하루는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이면 태리와 태라(7)를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부부는 함께 식사를 한다. 이후 연습실로 향해 노래를 준비한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언어 장애 때문에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많은 말을 건네거나 바로 답을 해주는 데 어려움이 있다. 대신 등하굣길을 함께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이대범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건강도 꾸준히 챙기고 있다. 운동을 이어가며 몸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특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자신을 돌보는 동시에 두 아이를 키우고 공연 활동까지 함께하는 아내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또 다른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연애 시절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곡이다. 이대범은 이 노래를 몰래 연습해 곧 예정된 버스킹 무대에서 아내에게 들려줄 계획이다.
■한 사람의 성공보다 함께하는 삶으로
오페라 가수였던 시절 이대범은 더 큰 무대와 더 큰 역할, 더 많은 성공을 향해 달렸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관객이 단 한 명뿐인 무대라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노래하겠다는 마음으로 무대를 기다린다.
이대범에게 노래는 과거의 경력을 되찾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자신이 겪은 시간을 지나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한 방법이 됐다. 완벽한 기량을 보여주는 것보다 자신의 목소리로 관객과 만나는 일이 중요해졌다.
소연 씨 역시 남편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때는 밀라노에서 함께 미래를 꿈꾸던 부부였지만 이제는 남편이 다시 노래하는 하루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매니저와 통역사라는 역할까지 맡았지만 그 출발점에는 가족으로서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
언젠가는 아이들과 함께 밀라노를 다시 찾고 싶다는 바람도 품고 있다. 가족의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는 도시를 다시 함께 걸어보는 것이 새로운 소망이 됐다.
6년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경색은 이대범의 삶을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의 노래까지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그는 매일 연습하고, 가족과 하루를 보내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대를 기다린다.
오는 10월 5일부터 9일까지 오전 7시 50분 방송되는 KBS1 '인간극장''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노래를 놓지 않는 바리톤 이대범과 그의 곁을 지키는 소연 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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