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평생 먹고살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은퇴와 함께 삶의 방향을 바꿨다. 바다를 좋아해 요트를 사고, 닭을 키우며 농장을 일구고, 사진을 찍다가 어부가 된 사람도 있다. 작은 섬에 정착하거나 빈 땅을 숲으로 바꾼 경우도 있다.
EBS1 '한국기행' 871편 '슬기로운 은퇴 생활'이 오는 5일부터 9일까지 오후 9시 35분 다섯 편에 걸쳐 은퇴 이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찾아간다.
■55세에 회사를 떠나 요트를 샀다
목포 앞바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김희범 씨는 글로벌 광고 기획사에서 28년 동안 일한 뒤 55세에 은퇴했다. 바쁘게 일하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은퇴 후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는 생활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요트였다. 친구들도 그의 계획에 출자금을 보탰다. 대신 조건은 하나였다. 언제든 함께 요트를 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마련한 요트는 김희범 씨에게 개인적인 취미를 넘어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주는 공간이 됐다.
은퇴 후 고향 목포로 돌아온 그는 요트에 관광객을 태우고 바다를 누빈다. 방송에서는 은퇴를 앞둔 친구들과 함께 목포에서 약 7km 떨어진 외달도로 향한다. 텐트를 치고 낚싯대를 드리운 채 보내는 섬에서의 하루는 회사에서 보내던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 농어가 낚이고, 서둘러 돌아갈 이유도 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부여 들녘에서 2천 마리 닭과 사는 부부
충남 부여에서는 최정수·김군자 부부의 은퇴 생활이 펼쳐진다.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부부가 부여로 내려온 계기는 손위처남의 한마디였다. 닭을 한번 키워보라는 제안이었다.
9년 전 부여에 내려왔지만 처음부터 농장 운영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최정수 씨는 전국의 유기농 방사 농장을 찾아다니며 사육 방법을 배웠다. 직접 경험을 쌓은 끝에 닭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현재 농장에는 약 2천 마리의 닭이 있다. 부부는 깨끗한 초지에 닭을 풀어 키우고 15가지 유기농 사료를 직접 배합한다. 유기농 부추를 간식으로 주는 일도 직접 한다. 매일 닭들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 부부에게는 은퇴 후 시작한 새로운 직업이자 생활이 됐다.
닭들은 하루 약 900개의 알을 낳는다. 최정수 씨가 농장에 나타나면 닭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회사에서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자신이 선택한 일터에서 매일 닭과 마주하며 하루를 보낸다.
■사진을 찍으려다 직접 바다로 나간 남자
강원 고성 대진항에는 은퇴 후 사진작가와 어부로 살아가는 이진수 씨가 있다. 33년간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연수 과정에서 접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은퇴 뒤에는 고향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대진항의 해남이었다. 1960년대부터 이곳에서는 바다에 나가 물질하는 남자들이 생겨났다. 당시 원양어선에 승선하지 못했던 남자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다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남자용 잠수복이 없어 해녀들의 잠수복을 빌려 입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진수 씨는 오랫동안 바다에서 일해온 해남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을 위해 배를 얻어 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좁은 배에서 작업을 이어가면서 어부들에게 방해가 될까 고민했던 그는 결국 2년 전 작은 문어 배를 마련했다.
배를 구입한 뒤에는 직접 문어잡이에도 나섰다. 매일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까지 바다로 나가지만 아직은 초보 어부다. 전업 어부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빈자리를 찾아 조심스럽게 조업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시작한 일이 직접 바다에 나가는 생활로 이어진 셈이다.
■10명이 사는 섬이 형제의 놀이터가 됐다
이봉수·이돈수 형제에게 바다는 은퇴 전부터 가까운 존재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함께 바다로 나섰던 형제는 은퇴 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형 이봉수 씨는 창원 합포를 기반으로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고지도와 '난중일기'를 들고 전적지를 답사한 횟수만 350여 차례에 이른다. 직접 이순신 전적 지도를 만들 정도로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들었다.
동생 이돈수 씨가 선택한 곳은 통영의 작은 섬 오곡도다. 주민이 10명인 섬에는 마트가 없다. 대신 바다에서는 낚시로 생선을 구할 수 있고, 텃밭에서는 필요한 작물을 직접 길러 먹는다. 이돈수 씨는 이곳에서 섬 생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형 역시 동생이 사는 오곡도를 자주 찾는다. 동생이 직접 키운 호박으로 전을 부치고 아궁이에 전어를 굽는다. 머루 포도까지 더해진 식탁을 둘러싼 뒤에는 섬 곳곳을 걸으며 시간을 보낸다. 야생화가 핀 길과 대나무 터널은 형제에게 바쁜 일상을 내려놓는 장소가 된다.
■월급 모아 산 땅에 5년 만에 숲을 만들다
마지막 이야기는 충북 제천시 수산면의 깊은 산골로 이어진다. 이성원 씨는 5년째 자신의 숲을 가꾸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농촌에서 살아온 사람도, 농사를 지어온 가족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자연이 살아 있고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숲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인생의 첫 번째 직업은 대기업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월급 대부분을 모아 목돈을 마련했고, 계획했던 시기가 오자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숲을 만들 땅을 찾았고, 나무 한 그루 없는 땅을 발견하면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땅을 가꿨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땅에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참개구리와 도롱뇽이 알을 낳고, 연못에는 다슬기와 민물새우가 자리 잡았다.
이성원 씨에게 숲은 쉬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매일 출근하는 일터다. 회사에서 정해진 업무를 수행했던 인생 1막과 달리, 지금은 자신이 선택한 땅에서 나무를 심고 생태계를 가꾸며 하루를 보낸다.
'한국기행'의 '슬기로운 은퇴 생활'은 은퇴를 직장에서 벗어나는 일로만 다루지 않는다. 목포의 바다, 부여의 농장, 고성의 항구, 통영의 섬, 제천의 숲처럼 각자가 좋아하는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람들의 생활을 따라간다. 다섯 사람과 가족이 선택한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은퇴 뒤에도 자신의 시간을 직접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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