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술대가 굵은 대현을 때린다. 현의 진동은 오동나무 몸체를 울리고, 빈 울림통에서 되받은 잔향이 객석에 번진다. 거문고 연주자 이정석은 ‘현의 그늘을 거닐다-Resonance Chamber’를 선보인다. 공연은 신쾌동류 거문고산조와 동명 창작곡 두 부분을 세운다. 핵심은 산조의 본래 호흡을 충분히 들려준 뒤 악기 내부까지 청취 지점을 이동시키는 설계다. 대숲에서 채집한 자연음, 라이브 전자음향, 악기 내부를 촬영한 영상이 개입하지만 출발점은 신쾌동류 산조다. 이정석은 “창작을 진지하게 밀고 나간 시간 끝에서, 오히려 전통의 힘은 더 단단하고 깊게 다가왔다”고 전했다.
첫 프로그램은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다. 거문고 이정석, 장구 정준호, 사운드스케이프 김영일이 참여한다. 산조 본연의 호흡과 여음을 중심에 두되 대나무 군락지에서 채집한 현장음을 아주 옅게 스며들게 한다. 자연음은 거문고와 장구 사이 잔향을 살리고 빈 공간을 넓히는 역할을 맡는다. 신쾌동류는 백낙준에게 받은 가락에 신쾌동이 독자 선율을 보태 정립한 유파다. 신쾌동은 17세 무렵 백낙준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고, 훗날 중중모리·엇모리·휘모리 등 독자 가락을 보강했다. 현재 전승 체계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휘모리 여섯 악장 체계로 정리된다. 굵고 역동적인 선율, 조성 대비, 힘 있는 술대법이 주요 특징이다. 지점은 전통 산조의 음향 공간을 어떻게 들려주느냐에 있다. 술대가 줄을 치는 타격음, 왼손 농현 때 생기는 마찰음, 울림통의 잔향까지 거문고가 내는 여러 소리를 한 덩어리로 듣게 하는 접근이다.
두 번째 프로그램 ‘현의 그늘을 거닐다’는 거문고 자체를 하나의 소리 공간처럼 해부한다. 창작곡의 악장은 오동→밤→장미→대나무 숲 순서로 전개되고, 마지막에는 완성된 거문고 ‘현금(玄琴)’에 수렴한다. 전통 거문고는 오동나무 윗면과 밤나무 아랫면을 붙인 울림통에 명주실 여섯 줄을 건다. 창작곡이 제시한 나무의 순서는 완성된 악기에서 출발해 재료의 숲까지 거슬러 가는 상상과 이어진다. 오동과 밤은 울림통의 물성을 떠올리게 하고, 장미와 대나무 숲은 악기의 세부 재료와 자연의 소리를 호출한다. 마지막 ‘현금’에서는 흩어진 재료 이미지가 한 악기에 수렴한다. 거문고를 연주 도구로만 보는 대신 나무와 줄, 빈 울림통, 술대가 맺는 물리적 관계까지 음악의 주제로 끌어들인 셈이다.
동명 창작곡은 전통 어법 위에 라이브 전자음향과 사운드스케이프, 영상 투사를 얹는다. 거문고와 라이브 일렉트로닉은 연주자 이정석이 맡고, 장구 정준호, 해금 최태영, 대아쟁 김성근, 대금 성휘경, 사운드스케이프 김영일이 합류한다. 악기 내부를 촬영한 ‘inside instrument’ 영상도 상영된다. 객석에서 보던 거문고 외형보다 울림통 안쪽, 현과 목재가 진동을 주고받는 공간에 귀를 옮기는 장치다. 공연 전반부가 산조를 ‘밖에서 듣는 시간’이라면 창작곡은 청취자를 악기 내부에 가깝게 데려간다. 라이브 전자음향은 거문고를 전자악기처럼 치환하는 목적보다 공명과 잔향을 확대하는 기능에 초점이 있다. 자연 채집음과 영상도 독립된 장식보다 거문고 내부 공간을 체감하게 하는 감각 장치로 쓰인다. 제목의 ‘Resonance Chamber’도 울림통을 하나의 공명실처럼 바라보는 구상과 닿는다.
2023년 발매한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는 거문고의 수음 자체를 연구 주제로 끌어들인 음반이었다. 마이크 스위트 스폿을 찾기 위해 위치를 반복 조정했고, 음향진이 거문고를 직접 익히며 악기 소리를 연구했다. 거문고 특유의 타격음과 농현 때 발생하는 잡음성 성분까지 지우기보다 악기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고민이었다. 2023년 국가무형유산 이수자 연구 지원사업에서도 이정석은 거문고산조 전수교육용 자료를 제작했다. 진양조를 중심에 두고 왼손 지법과 오른손 탄법을 세밀하게 익힐 영상 자료를 마련했다. 전통 연구와 창작을 한 궤도에 둔 태도는 올해 무대에도 지속된다.
전승자 이정석에게 이수자 지위는 완성의 표식보다 다음 세대에 음악을 건네는 중간 지점에 가깝다. 산조를 원형 그대로 연주하는 첫 프로그램과 거문고 내부를 새 감각으로 탐색하는 두 번째 프로그램이 나란히 서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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