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A씨는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목돈을 미리 주고 싶었다. 집을 마련할 때 보태라는 뜻이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노후자금은 충분했고, 언젠가 물려줄 돈이라면 자녀가 필요할 때 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증여하려니 걱정이 생겼다. 아들이 그 돈을 집을 사는 데 쓰지 않고 다른 곳에 투자한다면 어떨까. 한꺼번에 써버리거나 계획에 없던 사업에 사용한다면 이미 넘겨준 돈을 다시 돌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돈은 미리 주고 싶은데, 준 뒤에 어떻게 쓸지도 정할 수 있을까요.”
최근에는 상속을 기다리기보다 자녀가 필요할 때 재산을 미리 넘겨주려는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얼마를 증여할지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증여한 뒤 그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주고 나면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현금을 증여해 자녀의 재산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부모가 ‘집을 살 때 쓰라고 준 돈’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돈을 언제 어디에 사용할지 계속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자녀에게 소유권을 넘겨 증여를 마쳤다면 부모가 이전 소유자처럼 처분 여부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증여에는 서로 다른 두 마음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자녀가 필요할 때 재산을 미리 주고 싶지만, 너무 빨리 쓰거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 사용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럴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탁이다.
신탁을 통해 자녀에게 재산을 주는 것뿐 아니라, 이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되기를 바라는지도 미리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 등 믿을 만한 사람이 중요한 자금 지급이나 계약 변경 사항을 함께 확인하도록 정하거나, 일정한 사항에 동의가 필요하도록 정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는 증여를 마친 뒤에도 부모가 계속 주인처럼 재산을 좌우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증여를 되돌리는 것도 아니다. 신탁계약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사항에 관여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며, 필요하다면 부모나 가족 등 믿을 만한 사람이 중요한 자금 지급이나 계약 변경 및 해지 때 확인하거나 동의하도록 미리 정할 수도 있다.
자녀를 살피고, 때로는 부모도 지킨다
이처럼 가족 등이 계약에 따라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이유는 부모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큰돈을 처음 관리하는 자녀라면, 증여를 받은 자녀 자신을 보호하는 의미도 있다. 소비나 투자 판단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가족 등 믿을 만한 사람이 계약에서 정한 중요한 자금 지급이나 계약 변경에 대해 확인하거나 동의하는 역할을 맡도록 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목돈을 받은 자녀가 충분한 고민 없이 큰돈을 인출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서둘러 내리는 상황이 걱정될 수 있다. 이때 계약에서 정한 사람은 미리 정해 둔 범위 안에서 해당 거래를 한 번 더 살펴보는 역할을 맡는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녀와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부모가 자신의 재산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해보자. 평소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권유나 금융사기에 노출될 가능성을 걱정할 수 있다. 갑자기 큰돈을 찾거나, 누군가의 권유로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대출받으려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신탁계약에서 일정 금액 이상의 지급이나 중요한 재산 처분에 자녀 등 미리 정한 사람의 확인이나 동의를 거치도록 정할 수 있다.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와 다른 큰 거래가 생겼을 때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족에게 맡기는 역할은 계약마다 다르다.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처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약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중요한 거래에 관여하는 역할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결국 이런 신탁 활용은 누군가가 다른 가족의 재산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중요한 재산 결정을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돕는 방법에 가깝다. 재산을 받은 자녀를 보호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의 재산을 가족이 함께 살펴볼 수도 있다.
언제, 얼마를 줄지도 정할 수 있다
증여신탁의 방법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부모가 재산을 금융회사에 맡기고 자녀를 수익자로 정하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목돈을 한꺼번에 주지 않고 일정한 시기에 나누어 지급하거나, 계약에서 정한 때에 재산을 받도록 설계할 수 있다.
가령 자녀에게 지금 전액을 넘기는 대신 결혼이나 주택 마련처럼 목돈이 필요한 시기에 일부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이후에 나누어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누구에게 얼마를 줄 것인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 줄지, 한꺼번에 줄지 나누어 줄지까지 미리 정해 둘 수 있다.
다만 부모에게 어떤 권한을 남겨두는지, 자녀가 언제 어떤 권리를 갖게 되는지에 따라 증여 시점과 세금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실제 계약에서는 지급 방법과 세금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한다.
신탁한다고 증여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가족 간 증여에 신탁을 이용한다고 해서 별도의 증여세 감면이나 비과세 혜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신탁을 통해 자녀에게 경제적 이익을 무상으로 넘기는 경우에도 증여세 문제는 생긴다. 신탁은 세금을 없애는 방법이라기보다 재산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고 관리할지를 미리 정하는 방법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다만 장애인이 증여받은 재산을 법에서 정한 요건에 맞춰 신탁하는 경우에는 별도의 세제 특례가 있다. 2026년 현재 기준으로는, 요건을 충족하면 증여받은 재산가액을 최대 5억원까지 증여세 과세가액에 넣지 않을 수 있다. 일반적인 증여신탁과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증여는 재산을 넘기는 일이다. 하지만 가족의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자녀에게 지금 필요한 도움을 주면서도 너무 빨리 소진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의 재산도 예상하지 못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증여는 재산을 건네는 일에서 끝나지만, 그 재산을 오래 지켜주고 싶은 마음까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줄 것인가보다, 그 재산이 앞으로 어떻게 쓰이고 지켜지기를 바라는지. 증여신탁은 그 마음까지 미리 담아두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증여신탁=재산을 자녀 등에게 증여하는 과정에서 신탁을 활용해 재산의 관리와 지급 방법 등을 미리 정하는 방식
여성경제신문 김민수 KB스타자문단 유언대용신탁 자문위원
minsu.kim.tr@kbfg.com
김민수 KB스타자문단 유언대용신탁 자문위원
KB국민은행 신탁부에서 자산승계 신탁 실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KB스타자문단 위원으로 유언대용신탁 자문을 맡고 있다. 금융 및 시니어 관련 매체에서 신탁 칼럼니스트이자 평론가로 활동하며 생활 속 신탁의 활용법을 알리고 있다. 저서로 <신탁, 상속의 기준을 바꾸다> , <우리 가족 신탁 수업> 이 있다. 우리> 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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