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충분히 자고도 스스로는 거의 자지 못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를 ‘역설적 불면증(Paradoxical insomnia)’ 또는 ‘수면상태 오인지’라고 한다. 흔히 ‘가짜 불면증’이라고도 하지만 환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증상을 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수면시간과 자신이 느끼는 수면시간 사이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보고된 한 해외연구에서는 만성 불면증환자 862명 중 263명(30.5%)이 역설적 불면증 기준에 해당했다. 기존 연구에서도 진단기준에 따라 불면증환자의 약 9.2~50%에서 수면 상태 오인지가 보고됐다. 단 ‘밤새 전혀 못 잤다’고 느끼지만 객관적인 수면은 정상에 가까운 전형적인 중증 역설적 불면증은 약 5% 정도로 알려져 있다.
■“1시간도 못 잤어요”…실제로는 6시간 이상 수면
대표적인 사례가 “밤새 1시간도 못 잤다”고 호소하지만 수면다원검사에서는 총 수면시간이 6시간 이상, 수면효율이 85~90%로 나타나는 경우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비교적 얕은 단계인 N1·N2 수면이나 반복되는 미세 각성을 환자가 깨어 있던 시간으로 인식하면서 실제로 잔 시간을 크게 과소평가할 수 있다. 즉 잠을 자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잤는지’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과 객관적인 수면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 차이가 불면증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UC버클리 앨리슨 하비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보다 잠을 적게 잤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못 자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걱정이 커지고 이는 다시 지나친 각성으로 이어져 불면증상을 지속·악화시킬 수 있다.
■계속 못 잔다고 수면제 늘렸다간 오히려 위험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수면제를 복용하는데도 못 잤다는 느낌이 계속된다고 해서 임의로 약을 늘리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미 6~7시간 잠을 자고 있다면 문제의 핵심이 실제 수면시간 부족이 아니라 수면에 대한 인식 차이에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수면센터 한진규 원장은 “이를 확인하지 않은 채 졸피뎀이나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을 늘리면 실제 수면시간은 크게 늘지 않으면서 다음 날 졸림이나 집중력·인지기능 저하, 낙상, 내성 및 의존 위험 등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고령자나 수면무호흡증환자, 다른 중추신경 억제제 또는 술을 함께 섭취하는 사람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역시 졸피뎀 복용 후 다음 날 운전 등 각성이 필요한 활동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 오래 자기’보다 실제 수면상태부터 확인해야
따라서 계속 잠을 못 잔다고 느낀다면 무작정 수면시간을 늘리는 데 매달리기보다 내가 실제로 얼마나, 어떻게 자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작성한 수면일지와 수면다원검사 결과를 비교하면 주관적으로 느낀 수면시간과 실제 수면시간이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수면 피드백을 통해 ‘실제로는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돕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다.
만성 불면증에서는 인지행동치료(CBT-I)도 중요하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수면의학회는 성인 만성 불면증에 CBT-I를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한진규 원장은 “수면제를 복용해도 계속 한숨도 못 잤다고 느낀다면 무조건 약을 늘리기보다 신경과 전문의가 있는 수면클리닉에서 수면다원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뇌파를 포함한 실제 수면구조를 확인하고 수면무호흡증, 주기성 사지운동, 미세 각성 등 수면을 분절시키는 원인부터 찾아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