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김성훈은 정혜진·김재덕과 서울시무용단 '일무' 안무를 도맡아 올해 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41회 뉴욕 댄스 앤 퍼포먼스 어워드 2024 '최우수 안무가·창작자'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수상작 '일무'는 종묘제례악 의식무를 현대 무대 문법에 이식한 기획물이다. 김성훈은 유럽, 한국에서 다진 현대무용 경험을 토대 삼아 신체 연구, 일상 동작, 블랙코미디를 차용한 창작물을 잇달아 내놓았다.
9월 하다르 현대음악극단(Hadar Contemporary Music Theater·HCMT) 작곡발표회 '콜 미메르하크(Kol MiMerchak)' 무대에서는 대규모 군무를 배제하고 비올라, 바이올린 독주에 신체극을 접목한다. 악기에서 파생한 리듬이 몸 동작에 전이되고, 현악기 음색 변화와 무용수 호흡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Kol MiMerchak'는 히브리어 어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뜻한다. 박은혜와 뉴욕대학교 간 37년 인연에서 기획이 싹텄다. 서울, 뉴욕 기반 작곡가들의 악보를 한 무대에 올려 개인 내면에서 발원한 소리가 거리, 문화를 가로질러 타인에게 당도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참여 작곡가는 박은혜, 뉴욕대학교 음악과 교수 루이스 카친, 엘리자베스 호프먼, 윌 마틴, 안정연, 김수민, 조민주다. 총 7명이며 박은혜가 신작 두 편을 내놓아 연주 명단에는 8곡을 올렸다.
◇비올라는 저무는 시간…'두 저녁 사이에'
박은혜의 첫 신작 ‘두 저녁 사이에(Bein Ha’arbayim)’은 독주 비올라, 피지컬 시어터를 위한 곡이다. 우리말 번역은 '두 저녁 사이에'다. 출애굽기 12장 6절에서 빌려왔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으라 명한 '두 저녁 사이'는 특정 시각 하나를 지칭하는 개념을 초월해 낮과 밤의 경계를 의미한다. 유대 전통에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한 찰나부터 칠흑 어둠이 닥치기 전까지 다채로운 해석이 존재한다. 박은혜는 빛이 소멸하고 어둠이 도래하는 중간 상태를 비올라 음색과 묶어냈다. 비올라는 바이올린보다 낮고 첼로보다 높은 영역을 책임진다. 낮은 현이 뿜어내는 거친 울림부터 높은 배음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까지 폭넓게 구사할 수 있다는 악기 특성이 저녁의 변화, 인간 내면의 동요를 묘사하는 재료다.
연주는 비올리스트 이상민이다. 한양대 학사 과정을 밟고 독일 함부르크 음대 석사, 드레스덴 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수료한 연주자다. 드레스덴 필하모닉 객원 단원, 프라임필하모닉, 서초필하모닉 수석을 지냈고 현재 한양대 겸임교수 직함을 달고 있다. 몸 동작은 음악 밖에서 줄거리를 나열하는 역할을 배제하고 비올라 리듬, 음색을 신체 동작에 대입하는 구조를 취한다. 저음역에서 발원한 에너지, 음형 변화, 강약 굴곡이 무용수의 속도, 방향, 호흡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바이올린은 아침…'아침마다 새로우니'
두 번째 신작 ‘아침마다 새로우니(Chadashim LaBekarim)’은 독주 바이올린, 피지컬 시어터 접목물이다. 뜻은 '아침마다 새로우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을 모티프 삼았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파괴, 상실을 애도하는 시다. 3장 중반에는 절망 가운데 자비, 신실함, 새 아침을 부르짖는 구절이 등장한다. 박은혜는 짙은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을 바이올린 고음역에 연결했다. 강민정이 바이올린을 켠다. 서울예고, 연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함부르크 음대, 드레스덴 음대에서 수학했다. 드레스덴 최고연주자과정을 최고등급에 올려놓고 현재 한양대 겸임교수, 협성대 객원교수 등 교육 활동을 병행한다.
작곡에는 확장주법, 리듬 변형이 적극 쓰인다. 활의 운동, 음의 반복과 파편화, 고음역 특유의 맑은 음색이 신체 움직임과 조응한다. 현악기가 빚어낸 리듬을 무용수가 받아들여 움직임에 입히는 설계다. 'Bein Ha’arbayim', 'Chadashim LaBekarim'은 서로 짝을 이룬다. 비올라가 해거름 시간을 맡고 바이올린은 새 아침을 담당한다. 애도, 희망, 어둠, 밝음, 저음, 고음이 두 작품 안에서 뚜렷한 대비를 빚어낸다. 개별 감상을 배제하고 두 곡을 연속해 접하면 저녁에서 아침에 이르는 하루가 완성된다.
◇20편 넘는 협업…박은혜 음악과 김성훈의 몸
김성훈은 박은혜가 작곡한 현대음악극 20편 넘게 안무했다. 장기간 쌓인 협업 경험은 악보와 춤의 관계를 세밀하게 조율하는 토대가 됐다. 김성훈은 LDP무용단과 아크람 칸 컴퍼니에서 활동했다. 한국 현대무용과 유럽 무용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일상 동작, 블랙코미디, 무용수 각자의 신체 습관을 창작 재료로 삼았다. 일상의 몸짓을 관찰한 뒤 콜라주 방식에 따라 감각적 서사를 구성하는 작업도 지속했다.
대표 안무작에는 '몸의 위치(Position of Body)',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카카라(Cacara)', '훔친 관계(Stolen Relationship)', '초록 눈(Green Eye)', '노 필름(No Film)', '풀(Pool)',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 '삶의 계절(The Seasons of Life)', '단(Dan)', '떨어지는 물(Falling Water)', '마인드시커(Mindseeker)', '토치(Torch)', '조동(Jodong)', '자발적(Voluntary)', '일무(One Dance)', '그리멘토(Grimento)', '멘티스(Mentis)', '플래시(Flash)', '검수(Geom-su)', '핑크(Pink)' 등이 있다. 2022년 무용평론가상 베스트6에 선정됐다. 서울시무용단 '일무'는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도 올랐으며 정혜진·김성훈·김재덕은 베시상 안무 부문 수상자 명단에 올랐다.
◇철학이 깃든 현악 듀오, 온실을 재현한 플루트
공연 첫 순서인 윌 마틴의 '나는 사라지지만 세계는 지속된다(I perish, but the world endures)'는 전의석의 바이올린, 오한길의 첼로 연주에 쇼펜하우어의 죽음론을 투영한다. 두 현악기가 서로를 모방하다 서서히 소멸하는 구조를 짜 넣고 개인의 유한함과 세계의 영속성을 표현한다. 후속곡인 엘리자베스 호프먼의 '마거릿을 위하여(For Margaret)'는 승경훈이 연주하는 플루트 독주곡이다. 난초가 만개한 온실을 모티프 삼은 '더 밝게 다시 피어나다' 등 두 악절을 차용해 박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음향을 선사한다.
◇철학적 질문에 화답하는 네 개의 변주
안정연의 '패러다임 전환'은 토머스 쿤의 이론에 착안해 새 사고 체계가 기존 체계를 대체하는 과정을 관현악 확장주법을 활용한 리듬과 음색 변화에 담아낸다. 김수민의 '미묘한 범위'는 피아노 저음역 톤 클러스터와 고음역 4분음 미세음정을 엮어 완전과 불완전 경계에서 파생하는 모호한 안정감을 정교하게 변주한다. 조민주의 '남가일몽'은 동양 고사와 데카르트의 꿈 논증을 결합해 현실과 꿈을 구별하려는 철학적 질문을 수직 화성, 다채로운 현악 주법, 온음음계에 녹여냈다. 피날레를 책임지는 루이스 카친의 '카프리치오에 가까운 소나타'는 전의석의 바이올린과 이기상의 피아노 화음을 빌려 빠름-느림-빠름의 소나타 형식 내부에 예측 불허한 즉흥 선율을 가미해 자유분방한 카프리치오 성격을 부각한다.
◇2004년 창단 HCMT…현대음악과 신체극의 오랜 실험
하다르 현대음악극단(HCMT)은 박은혜 주도 하에 2004년 첫 닻을 올렸다. '하다르(Hadar)'는 히브리어 조어법 내 영광, 아름다움을 뜻하는 어휘다. 박은혜는 이화여대 음악대학, 미국 사우스웨스트 침례대학교(Southwest Baptist University) 학사를 수료하고 뉴욕대학교 석사, 아메리칸 컨서버토리 오브 뮤직(American Conservatory of Music)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이래 개인 작곡발표회를 16회 개최했으며 국내외 음악제, 연주단체 무대에 본인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HCMT 창단 직후 현대음악극 20편 이상을 무대에 올렸다. 현대음악을 기둥 삼아 무용, 연극, 신체극을 적극 결합했다. 2006년 미국 플로리다 EMIT 시리즈(EMIT Series) 초청 공연 일정에 따라 탬파, 세인트피터즈버그를 순회했고, 2015년 한·루마니아 수교 25주년 음악회 명단에 합류했다. 지난해 3월 스페인 알메리아 국제음악제, 그해 9월 서울시 안보 기획 공연 무대 초청장도 받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HCMT가 오랫동안 파고든 현대음악, 신체 관계를 집중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비올라 묵직한 울림은 해 질 무렵 내면 상태에 결부되고 바이올린 맑은 음색은 새 아침을 정조준한다. 쇼펜하우어 죽음론, 성서에 적힌 저녁과 아침, 쿤 패러다임, 데카르트 꿈 논증 등 이질적 사유 체계가 각기 다른 작곡가 악보에 빈틈없이 스며들었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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