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노묘정 작가]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유영국, 이대원 작가의 전시를 본 뒤 한국 근대 미술 작가에 관심이 생겼다. 이번 칼럼에서는 한국의 풍경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해석해 그린 작가들-유영국, 이대원, 김환기, 장욱진, 박수근-에 대해 다뤄보려고 한다.
이들은 조선에서 전통적으로 그려오던 산수와 달리 캔버스와 유화라는 새로운 재료를 접하고,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등을 통해 서구 현대미술을 접한 세대다. 하지만 서양 미술을 그대로 모방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의 풍경을 자기만의 조형 언어로 바꾼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첫 번째로 살펴볼 작가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산은 내 안에 있다’라는 이름으로 전시 중인 작가 유영국이다.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일본 화단에서는 서구의 추상미술과 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위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유영국 역시 사실적인 풍경이나 인물을 그리는 대신 색과 형태 자체를 탐구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졌다. 초기에는 베니어판을 자르고 조합한 기하학적 부조처럼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인 추상 작업도 시도했다. 1940년의 ‘Work’처럼 화면은 선과 면, 색의 관계 자체를 탐구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고, 특정한 풍경을 재현하려는 의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귀국 이후 그의 작업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고향 울진에서 생활하고, 전쟁과 생업을 거치며 다시 한국의 자연을 가까이하게 되면서 산과 바다, 계곡 같은 풍경이 그의 화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만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익힌 추상의 언어를 자연에 적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 산의 나무나 바위를 그리는 대신 산의 구조를 삼각형과 곡선, 색면으로 바꾸고, 자연에서 느낀 힘과 질서를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부터 유영국의 그림은 완전한 기하학적 추상과 구체적인 자연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만들어간다.
유영국에게 중요한 것은 저 산이 어떻게 생겼는가 아니라 산을 바라볼 때 인간이 느끼는 압도감, 힘, 깊이, 긴장 같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세부 요소들을 지우고 산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색과 형태만 남을수록 산이 가진 힘은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 산을 바라봤을 때 느꼈던 강렬한 느낌을 그의 회화 앞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유영국이 평생 그린 산들은 각각의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1950년대의 산은 두꺼운 물감과 거친 질감 속에서 묵직한 덩어리처럼 자리하고 있고, 1960~70년대로 갈수록 봉우리와 능선은 삼각형과 직선, 선명한 색면으로 또렷하게 정리된다. 마치 산이 가진 구조와 힘을 하나씩 찾아내 화면 위에 세워놓은 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단단했던 산도 조금씩 달라진다. 1980년대의 작품에서는 직선 사이로 곡선이 늘어나고, 산과 바다의 모습도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 1990년대의 ‘산-Blue’에 이르면 다시 강한 기하학적 형태가 나타난다. 평생 같은 산을 그렸지만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유영국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보는 풍경은 달라진다. 젊은 시절 기하학적인 추상을 실험하던 화가에게도, 생업을 위해 배를 몰고 양조장을 운영하던 때에도,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 매일 캔버스 앞에 앉던 노년의 화가에게도 산은 곁에 있었다.
그래서 유영국의 산은 특정한 장소의 풍경이기보다 한 사람이 평생을 통과하며 만들어낸 풍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는 산 속에서 자신의 삶도 함께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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