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세가와 겐페이 주간이다. 서평 워크숍을 준비하며 『초예술 토머슨』을 다시 읽은 게 시작이었다. 흔히 고전을 가리켜 처음 읽을 때도 늘 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초예술 토머슨』이 고전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시 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계단(‘순수계단’), 열리지 않도록 꽉 막힌 채 존재하는 문(‘무용 문’), 허공에 난 문(‘고소 문’) 등 쓸모를 잃은 채 보존되고 있는 구조물들을 ‘초예술’이라고 개념화하고, 거기에 고액 연봉을 받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좀처럼 공을 맞추지 못한 채 삼진만 쌓아가던 야구 선수 개리 토머슨의 이름을 붙였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초예술 보루갈’* 정도일까? 아니다. 이래서야 맛이 살지 않는다. 토머슨은 토머슨이다. 둘, 아니 셋이 될 수 없다.
(*2021년 후반부터 2022년까지 LG 트윈스의 외국인 타자였던 저스틴 보어-리오 루이즈-로벨 가르시아를 가리킨다. KBO에서 뛰는 동안 그들은 셋이 합쳐 58개의 안타를 쳤고, 83개의 삼진을 당했다. 타율로 치면 1할8푼1리. 참고로 LG 트윈스의 염경엽 감독이 보유하고 있는 KBO 1500타석 이상 최저 타율 기록은 1할9푼5리다.)
겐페이는 초예술 토머슨을 《사진시대》라는 잡지에 연재했고, 겐페이 일당이 소소한 장난처럼 시작했던 프로젝트는 독자들의 열광적인 참여와 함께 일종의 예술 운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부동산에 딸려 보존된 무용한 구조물을 넘어 벽보나 포스터, 표식, 간판, 도로 공사로 생기는 구멍이나 쌓아 놓은 흙,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생활폐기물 등을 대상으로 하는 ‘노상관찰학’으로 이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노상관찰학 입문』을 읽어보시길.
분명 재미있는 개념이고 시도다. 이제는 하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까지 재미있을 일인가? 다시 읽으며 새삼 놀랐다.
1953년 로버트 라우션버그는 당시 거장이던 윌렘 드 쿠닝에게 그림 한 점을 받아 지우개로 지워버린 다음 〈지워진 드 쿠닝 드로잉〉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분명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굳이 그 그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우개로 그림을 지운 종이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가 제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최근 우리는 지우개 청소기를 구입했다. 삶이 한층 쾌적해졌다).
1969년 로버트 배리는 《Closed Gallery》라는 제목의 전시를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며 전시 기간 동안 갤러리가 닫혀 있을 거라고 적었고, 실제로 그 기간 내내 갤러리는 닫혀 있었다. 재밌다. 하지만 내게 초대장을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굳이 닫힌 문을 보러 갤러리에 가지는 않을 것 같다(물론 이 경우 초대장도 엄연히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초대장을 거부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초예술 토머슨의 장점은 개념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왔던 대상들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증식시킨다. 우리는 예술가의 예술적인 생각에 감탄한 다음 각자 할 일을 하러 가는 대신, 아니 각자 할 일을 하러 가긴 해야겠지만, 일상에 잠식돼 좁아진 시야 한켠에 우리도 모르게 ‘초예술 토머슨’을 위한 약간의 공간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한 손에 늘 잠자리채를 들고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하지만 이런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초예술 토머슨』을 재밌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유머다. 시침 뚝 떼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능청맞게 둘러 말하는 겐페이의 문체는 느긋한 리듬으로 동떨어진 것들을 한데 묶고 지엽말단을 파고들며 기어코 피식, 하는 웃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구절을 보라. 철거된 동네에 홀로 남아 있는 높다란 목욕탕 굴뚝 위에 올라가 위태롭게 서서 어안렌즈로 찍은 ‘셀카’를 제보받은 겐페이의 감상이다.
"놀라웠다. 감동했다. 바보에게 감동했다. 아니, 바보라고 하면 역시 무례하다. 하지만 이런 감동 앞에서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다 날아가 버린다. 이것은 역시 바보와 종이 한 장 차이의 모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 한 장의 종이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사진 ⑦을 보자. 동행한 나가사와 군이 찍은 사진이다. 바보와 종이 한 장 차이의 굴뚝을 올라가는 모험 중인 이무라 군이다. 나가사와 군은 이 사진을 찍은 뒤 도저히 계속 지켜볼 수 없어 집과 집 사이의 골목길로 들어가 눈을 가렸다고 한다." (127쪽)
이제 ‘다시’라는 단어가 나올 차례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고,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즐겁게 읽었다. 이상한 건, 막상 처음 읽을 때에는 이만큼 재밌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유가 뭘까? 나는 정당한 의문을 품은 채, 그러나 그 의문을 파고들지는 않으면서, 『초예술 토머슨』과 함께 구입했지만 지금껏 펼치지도 않았던 『노상관찰학 입문』을 처음으로 읽었다. 짧은 감상을 말하자면 재밌었다. 근데 『초예술 토머슨』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혹시 모르지, 다시 읽으면 또 어떨지. 어쩌면 ‘처음’이란 지나치게 과장된 개념이 아닐까?
내친 김에 2024년에 번역된 『노인력』과 두 달 전에 소리소문 없이 출간된 『잘 먹겠습니다! 미식 탐험단』까지 사서 읽었다. 그러다 『초예술 토머슨』의 초독과 재독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그건 바로 시간이다. 『초예술 토머슨』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 나 사이에 존재하는 2년이라는 시간.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중년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실제로 지난 2년 동안 나는 5년 이상을 늙었다고 말해도 좋다. 겐페이를 따라 말하자면 이것은 그저 느낌일 뿐, 어떤 증거도 되지 않지만.
겐페이는 『노인력』에서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세상에서는 신체와 정신의 점진적인,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가리켜 노화라고 부른다. 기억력이 나빠지고, 체력이 약해지고, 시력이 흐려지는 식으로—원래 지니고 있던 힘이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겐페이는 반대로 ‘힘을 빼는 힘’이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힘, 경기 후반 1점 차로 뒤진 2사 만루 상황에서 힘을 빼고 툭 밀어쳐서 득점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실제로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흔치 않다는 걸 야구 팬은 알 것이다—그것이 바로 노인력이다.
안 그래도 깜박하는 힘이 너무 세져서 조금 곤란해하고 있던 차였다. 과자 봉지를 뜯거나 음료수 뚜껑을 열 때마다 과거의 감각으로는 가볍게 될 일이 좀처럼 깔끔하게 되지 않아서 ‘언제 이렇게 힘 빼는 힘이 늘었지?’ 새삼 놀라는 일도 잦아졌다(덕분에 과자가 사방으로 튄다거나 탄산이 솟구치는 일은 전혀 없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런 ‘힘뺀힘’이 책을 읽는 데도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초예술 토머슨』을 보며 전과 달리 허허허, 마냥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노인-됨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초예술 토머슨』을 읽으며 몇 달 전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구입했지만 읽지 않은 채로 곧바로 책장에 꽂힌 책이 한 권 떠올랐다. 그 뭐냐…… 산책…에 관한 책이었는데…… 똑같은 동네 산책길을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걷는…… 저자가 동물학자? 아무튼 개를 연구하는…… 알…뭐더라, 그래, 호로비츠…아무튼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책장으로 가서 그런 책이 있을 만한 칸을 훑었고, 곧바로 찾던 책을 발견했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관찰의 인문학』,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책을 찾아 들뜬 기분으로 책장을 펼치는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이 책이 분명 맞는데, 이 책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또로록, 식은 땀이 흘렀다.
나는 어떤 예감 속에서 다시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관찰의 인문학』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이토록 지적인 산책』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부제는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끝없는 놀라움에 관하여’, 저자는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였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이게 바로 내가 몇 달 전에 구입한 책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책은 뭐지? 또로록……
『관찰의 인문학』은 박다솜의 번역으로 2015년 시드페이퍼에서 출간했다. 『이토록 지적인 산책』은 역시 박다솜의 번역으로 2024년 라이온북스에서 출간했다. 그리고 둘은 모두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본다는 것에 대하여: 전문가의 시선과 함께 한 열한 번의 산책(On Looking: Eleven Walks with Expert Eyes)』의 번역본이다. 절판된 책이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 된 경우다. 실제로 둘은 표지와 판형과 정가와 편집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동일한 책이다. 토씨 하나 정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다른 부분을 찾진 못했다.
문제는 『관찰의 인문학』이 어떻게 내 책장에 자리 잡게 되었느냐다. 아내가 산 책일까? 자연발생했나? 혹은 이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은 가설로, 책 도둑과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의 존재가 훗날 내가 읽고 싶어질 만한 책을 들고 몰래 서재에 침입해서 내가 그 책을 꽂아두었을 법한 바로 그 자리에 책을 꽂아두고 표표히 사라졌을까?
미스터리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인터넷 서점의 구매 목록을 검색하니 2017년에 내가 구입했다고 나왔다. 어떻게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9년 동안이나 발견하지 못했는지(이렇게 쉽게 보이는 곳에 꽂혀 있는데!) 등등은 여기서 굳이 다루지 않겠다. 그런 지엽말단적인 문제를 파고들기엔 내게 주어진 지면이 얼마 남지 않았고, 어차피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놀라움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원래 이 글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다. 최근 재출간된 몇 권의 책들을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 판본과 비교하며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다년간 서평을 써온 ‘전문 서평가’의 냉철한 시선으로 비교하고 분석할 계획이었는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내 책상 한쪽에는 이제 책을 그만 사야지 매번 절실하게 다짐하면서도, 채널예스에 신간 큐레이션 원고를 써야 하니 휴,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억지로 사놓고 소개하지 못한 책들이 재개발 구역에 홀로 남은 목욕탕 굴뚝처럼 높다란 탑을 이루고 있다. 쓸모를 잃은 채 보존된 것들의 쓸쓸한 아름다움.
이렇게 아카세가와 겐페이 주간도 끝이다. 정작 신간인 『잘 먹겠습니다! 미식 탐험단』(일상에서 초예술을 찾아냈듯 평범한 음식에서 ‘초음식’을 찾아 맛깔나게 풀어낸다)은 전혀 소개하지 못했지만, 대신 겐페이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며 마무리하겠다. 총총.
"깜빡했는데 누카즈케(*쌀겨에 절인 채소)와 단무지 사이에 배추절임이 있다. 이걸 빼놓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미 원고 분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낭패다.
이런 실수는 밥을 먹을 때도 자주 범한다. 밥상에 누카즈케가 올라오고, 단무지도 올라오고, 배추절임도 올라왔을 때 밥을 먹고 누카즈케를 먹고 다시 밥을 먹고 단무지를 먹다가 누카즈케만 먹으면 안 되니까 주반찬인 참치데리야키구이인지 뭔지를 먹고 밥을 먹고 된장국을 마시고 밥을 먹고 그렇게 하다 보면 배가 불러오고 밥그릇에도 밥이 얼마 남아 있지 않는다. 즉 밥과 반찬의 회전을 잘못 계산해 쓰케모노(*절인 채소)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윤기가 잘잘 흐르는 아이보리색 배추절임을 벤치에 그대로 둔 채 시합이 끝나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배추만이 아니다. 갓도 있다. 갓을 젓가락으로 펼쳐서 밥 위에 올려 김처럼 싸서 먹을 때의 행복감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채소인 노자와나도 있다. 갓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다르다. 도쿄산은 물론이고 주요 생산지인 나가노나 니가타에서 먹으면 맛이 풍성하고 깊다. 그렇지만 벤치에 있는 이들 쓰케모노 전부를 먹기에는 이미 밥그릇도 텅 비었고, 분량도 다 되었으니 감독으로서 반성한다." (69-71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Copyright ⓒ 채널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