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생의 뒤에서 바라본 세상을 언어의 화분에 담아 보여준다.”
▲시 한 편
<장마> - 김지헌
한바탕 뒤집어졌으면
화려한 전복을 꿈꿨다
꽃들이 납작 엎드렸다
굴종의 목덜미에 기총소사로 퍼붓는 저 폭포수
섣불리 고개 들었다간
가차 없는 죽음의 난장이 시작될 것이다
저 강물
야수의 얼굴 숨긴 채
등 떠밀려 그만 손을 놓쳐 버렸다
잠시라도 졸았다간 벼랑 끝
그렇게
생이란
눈 부릅뜬 채 깨어 있어야 한다고
▲시평
시집을 읽다가 딱 눈에 띄는 시는 누가 봐도 좋다. 그 시에 눈독을 들이면, 어느새 눈 밝은 사람이 선점해 단평을 달아놓았다. 차선이라 해서 그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집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장마」는 마치 다음에 “화려한 전복을 꿈”꾸는 듯하다. 폭우가 내리는 장마는 위험하다. 언제 집안이 물에 잠길지, 뒷산 토사가 밀려 내려올지 몰라 “눈을 부릅뜬 채 깨어 있어야 한다”. 좋은 점도 있다. 가뭄 끝이라면 해갈에 도움이 될 것이고, 더러운 것들이 몽땅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자아의 심리적 위기를 ‘꽃’이라는 사물로 투영해 보여준다. 개인의 삶을 넘어 시대적·사회적 재난 속에서 느끼는 위기감과 무력감에 그치지 않고 생존 투쟁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시에서 장마는 꽃들(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환경이다. 1연의 “한바탕 뒤집어졌으면/ 화려한 전복을 꿈꿨다”라는 문장은 시의 화자가 세계의 모순을 뒤엎으려는 혁명의 주체였다가 좌절했음을 의미한다. 꿈만 꾼 것인지, 행동으로 옮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어진 납작 엎드린 꽃들과 “굴종의 목덜미”에 퍼붓는 기총소사는 세상을 뒤엎으려다 실패로 끝난 혁명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무자비한 빗줄기의 폭력으로 땅에 엎드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꽃들의 대비는 진한 슬픔과 분노를 유발한다. 위에서 아래로 가해지는 압도적인 물리력에 힘없는 민중은 저항조차 못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색채의 소멸이다. “화려한” 전복의 대상은 “꽃들”이고, 그 꽃들은 원래는 다채로운 색깔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난장”이라는 냉혹한 현실(흑백) 앞에 화려한 이상(색채)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납작 엎드려 살아남았다고 안심할 것도 아니다. 물길에 휩쓸려 냇물로 떠내려갈 때까지는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강물에 이르자 “그만 손을 놓쳐 버렸다”. 이산(離散)이다. 의지하던 손을 놓치는 순간 생(生)과 사(死)는 오직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운명이 좌우한다.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다가 거대한 폭포라도 만나면 정말 끝이다. 혁명의 좌절과 이산의 고통에도 깨어 있는 삶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이 시는 굴종을 강요하는 거대한 파국 앞에서도 도피나 체념 대신 실존적 깨어 있음과 최후의 존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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