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설집 '새들의 사회성' 펴내…'포도밭 묘지' 등 8편 수록
비관적 세상 속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들 다뤄…잔혹 묘사는 줄어
"희망은 잘 되리란 확신 아니라 별것 없는 삶을 견디는 작은 힘"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예전에는 사회를 해부하듯 직접 벼린 칼을 들이미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다면 이번에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국 문단에서 그로테스크 미학 세계를 개척해온 편혜영(54) 작가가 5년 만에 새 소설집으로 돌아왔다.
문학동네에서 '새들의 사회성'을 펴낸 편혜영을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작가는 이번 작품집을 쓴 배경에 대해 "세계는 변하지 않았거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참혹해졌는데도 사람들은 나날의 삶에서 기쁨을 만들고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게 흥미롭다"며 "이전의 작품들이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데 가까웠다면, 이번 소설들은 그 균열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집에는 작품 세계의 변화가 감지되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기존에 작품을 지배하던 차갑고 기괴하고 섬뜩한 묘사는 확연히 줄고, 작가의 시선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온기와 유머가 느껴진다.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편혜영은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을 필두로 일상의 불안과 공포, 인간의 폭력성과 소외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그려내며 미학적 새 지평을 열었다. 특히 장편소설 '홀'로는 미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셜리 잭슨상을 받는 등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불편함과 불쾌감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잔혹한 현실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지금 이 시대의 배를 갈라 그 내장을 섬뜩하게 꺼내 드는 새로운 소설을 쓰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작가에게 어떤 세계관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초점이 조금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멀리서 보면 세상은 여전히 엉망이고 낙관을 갖기 어렵지만, 개별적인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기쁨을 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예전보다 그 개별적인 삶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표제작인 '새들의 사회성'은 오랜만에 재회한 두 고교 동창의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그 재회가 감동적 해후는 아니다.
제약회사 마케팅팀에 겨우 인턴으로 취직한 '나'는 어느 날 은행 자동화 코너에 돈을 뽑으러 갔다가 ATM에 놓인 빨간 지갑을 보게 되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지갑에서 3만원을 슬쩍 꺼낸다.
그리고 점유이탈물횡령죄 신고로 경찰서에 출석하고 나서야 그것이 함정이었단 사실을 깨닫는다. 신고자가 터무니 없이 지갑에 100만원이 들었다고 주장했기 때문.
공교롭게 신고자는 고교 시절 동창인 '신도'였고, 두 사람은 '빚'으로 서로 묶인 채 어쩔 수 없는 동행에 나선다.
작품엔 이런 두 사람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장면도 나온다.
철새들이 커다란 브이(V)자 형태로 늘어서서 나는 모습을 본 나와 신도가 감탄하자,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약하니까요. 약한 것들을 저렇게 몰려다녀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죠" (68쪽)
편혜영은 "이 책에는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이야기가 많다"며 "인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선하거나 악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개인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새들의 사회성'에 나오는 두 인물은 그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도 '새들의 사회성'을 꼽았다.
작가는 "어떤 작품을 쓰는 것으로 인해 이후 소설이 조금 달라지기도 하는데, '새들의 사회성'이 그랬다"며 "이 작품을 쓰고 나서부터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고 돌아봤다.
그는 "어쩌면 (표제작의) 두 인물이 이후에 쓰인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수록작 중 2022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포도밭 묘지'도 빼놓을 수 없다.
상고 시절부터 사회 초년생 시절까지 함께 겪으며 서로의 노력과 좌절의 순간을 지켜본 네 친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낮엔 은행을 다니고 밤엔 야간대학에 다니며 더 나은 삶을 꿈꾸던 은행원 한오를 중심으로, 대학 대신 노동을 선택해야 했던 이들의 상처와 조용한 연대를 다뤘다. 학력과 성별을 둘러싼 장벽과 노동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다.
편혜영의 초기 작품이 주로 인간 내면 불안과 공포 등을 탐구했다면, '포도밭 묘지'는 이런 문제의식을 사회적 현실과 계급의 문제로 확장했다.
다만 일상의 균열을 통해 불안과 상실을 드러내는 특유의 문체와 절제된 서술은 여전하다.
또 그의 소설은 여전히 비관에서 출발한다. 인물들의 과거는 후회고, 현실은 불만족이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절망의 끝에 이르고 나서야 결국 발견하는 것은 작은 희망이다.
편혜영은 "작품에서 잔혹하거나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사라졌어도(웃음) 삶은 기본적으로 공정하다고 믿지 않는다"며 "다만 예전에는 희망이 없으면 곧 절망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희망 없음의 상태가 그대로 절망을 의미한다고는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희망은 미래가 잘 되리라는 확신이 아니라, 별것 없는 세계에서도 나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아주 작은 힘 같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후속 작품 계획도 물었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우리가 가는 곳'이라는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삶의 막다른 길에 내몰려 '자발적 실종'만이 '사는 길'이라고 여기게 된 여자가 실종 대행업자와 함께 여정에 나서는 이야기다.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익숙한 삶을 등지고 스스로 실종 상태, 이른바 '증발'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kihun@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