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우리는 서로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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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우리는 서로의 문장이었다

뉴스로드 2026-08-05 15:17:14 신고

사진제공=문학의숲
사진제공=문학의숲

용인시 수지구의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가 2024년 한 해 동안 진행한 글쓰기 프로그램의 결과물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제목은 ‘우리는 서로의 문장이었다’.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여성 12명이 매주 일요일 모여 함께 읽고 쓰며, “별일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라는 감각을 문장으로 옮긴 기록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문장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무엇이든 가능하다’에서 가져왔다. 드라마틱한 반전도, 든든한 조력자도, 해피엔딩의 판타지도 없는 일상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책은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직과 퇴직, 비혼과 기혼, 부모 돌봄과 1인 가구로 갈라지는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한 자리에 놓인다. 그 결과는 ‘중년 여성 서사’라는 한 줄로 뭉뚱그리기를 거부하는, 열두 사람의 연대기다.

책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1부 ‘나이듦 – 공간과 몸의 변화’는 집과 몸이라는 가장 물리적인 지점에서 시작한다. 집이 있었다가 사라진 뒤의 10년을 돌아보는 무주택 연대기, 벨기에에서의 6년과 집짓기 과정을 기록한 글들은 ‘사는 곳’을 스스로 일궈온 시간을 들여다본다. 직장생활 연대기와 달리기의 기록은 몸을 써서 버텨온 세월의 축적이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 사연, 갱년기에 시작한 공부, 질병을 계기로 자신을 다시 진단하는 글들은 이제야 몸의 신호에 귀 기울이게 된 순간을 담는다. 지방에서 여자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일,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글까지 이어지며, 결국 ‘내 몸과 내가 있는 자리’를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2부 ‘전환 – 일자리와 인간관계 리부팅’은 정년, 퇴사, 재취업, 은퇴 등 일의 언어가 바뀌는 시기를 통과하는 이야기들이다. 62세에 ‘재취업 노마드’가 된 삶, 목표를 퇴사가 아닌 은퇴로 정한 선택,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담담한 고백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 하나의 정답으로 정리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밥벌이와 상관없는 ‘쓸데없는 공부’로 삶을 다시 켜보는 이야기, 홀로 지내는 삶의 기술을 기록한 독거 연대기는 일 바깥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엄마와 함께 늙어가는 두 편의 글, 이혼 이후를 통과하는 기록, 계속 영화를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까지, 오래된 관계와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전환기의 리부팅’이 이어진다.

공동체 안에서의 글쓰기는 무엇보다 ‘함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매주 일요일 모였다”는 프롤로그의 문장처럼, 이들은 함께 읽은 책에 의지해 각자의 수치심과 두려움, 혼란을 입 밖으로 꺼냈다. “수치심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직하려 애썼던 작가들의 용기에 기대어 우리도 용기를 내봤다”는 고백에는, 타인의 문장을 발판 삼아 자신의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이들의 태도가 담겨 있다.

개별 서사 역시 일상에서 비켜나지 않는다. 집을 잃은 뒤 “집이 없어서 겪게 된 것과 알게 된 것들”을 말하는 글은, 불안과 동시에 달라진 감각을 함께 포착한다. 집이 없다고 해서 곧장 불행이 달라붙지는 않았고, 가족이 지긋지긋해진 것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은, 소유의 유무로 삶을 단순히 나누기 어려운 현실을 드러낸다. 결혼 제도 안에서 스스로 ‘울타리’의 논리를 내면화해온 과정을 돌아보는 글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말로 살아온 시간을 뒤늦게 알아가는 자기 진단에 가깝다.

일과 노후를 둘러싼 불안은 보다 노골적이다. 자신을 “생계형 노인”이라고 부르는 필자는 재취업과 일탈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말하면서도, “그 삶이 나를 돌보지 못하는 삶이라면 계속 가난을 각오하겠다”고 적는다. 또 다른 필자는 “나의 목표는 퇴사가 아닌 은퇴”라고 선언하면서도, 퇴직 이후를 상상하는 일에 깃든 불안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반대로 “현실적이지 못했던 선택들이 결국 나를 가장 현실에 기반한 삶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는 글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여유를 전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삶의 방향을 정리해주는 외부의 답을 기다리기보다 ‘쓰는 일’로 돌아간다는 데 있다. 자격증을 수십 개나 따온 필자는 이제 밥벌이와 무관한 공부를 “쓸데없는 공부”라 부르며 계속해 나간다. 독자에게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선택이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리부팅하는 기술이다. 이처럼 책 속의 글쓰기는 이력서도, 자기소개서도, 사건경위서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형식을 닮은, 자기 삶을 다시 정리해보는 시도들이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2024년이지만,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2026년 7월이다. 그 사이 필자들의 삶도 멈추지 않았다. 퇴직을 꿈꾸던 이는 실제 퇴직자가 됐고, 누군가는 부모의 장례를 치렀으며, 또 다른 이는 순례길을 다녀왔다. 책은 완결된 회고록이라기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삶의 한 구간을 붙잡아둔 기록에 가깝다. 필자들은 자신의 평범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독자에게 가닿아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문탁네트워크는 “친구와 함께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인문학 공동체”를 자임한다. 다양한 강좌와 세미나, 연대 활동을 통해 관계의 확장과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해온 이 공동체에서, 이번 책은 그동안의 실험이 한데 모인 결과물이다. 인문학 강사, 독서토론 진행자, 25년 차 직장인, 20년 전업주부 출신 재취업자, 60대 재취업 노마드, 독서논술 교사, 워킹맘, 영화 시나리오 작가 등 각기 다른 이력의 필자들이 ‘문장’이라는 공통의 언어로 만났다.

‘우리는 서로의 문장이었다’는 제목은 이 책의 방식이자 약속이다. 각자의 삶은 완결된 서사가 아니지만, 서로의 문장을 읽고 쓰며 겹쳐질 때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중년 이후의 삶을 ‘관리’나 ‘설계’의 언어가 아니라, 망설임과 질문, 실패와 실험의 언어로 다시 써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참고서가 된다. 동시에, “별일 없는” 타인의 일상 속에서 자기 삶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이 느리고 단단한 기록은 충분한 여백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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