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영유아교육포럼은 조기 사교육 광풍 속에 대한민국 아이들의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한 26인의 릴레이 기고 '아이들의 시간을 지켜주세요'를 연재합니다. 4살 아이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치르고, 만 5세가 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실이 텅 비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영유아 교육의 현실입니다. 조기 선행학습은 아이들의 발달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 할 놀이와 탐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습니다. 영유아 교육 현장의 교사, 연구자, 부모, 정책 전문가 26인은 조기 사교육이 아이들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교육 현실을 짚고, 국가와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조기가 아닌 ‘적기교육’을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제안합니다. 빨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때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권리입니다. -편집자 말
영유아 시기는 세상을 탐색하고 친구와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이다. ⓒ베이비뉴스
“원장님, 여기는 특별활동으로 무슨 프로그램을 해요?”
신입 원아 상담 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34년 전,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 부모님들이 건네던 “우리 아이 오늘 잘 놀았나요?”라는 다정한 안부는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부모님들의 시선은 아이의 표정보다 화려한 특별활동 브로슈어와 빽빽한 시간표에 머뭅니다.
유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유아 중심·놀이 중심’ 교육을 사명으로 여겨온 기관들은 이제 학부모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반면 영어, 수학, 코딩 등 학습 위주의 특성화 프로그램이 가득한 곳은 입소 대기가 줄을 잇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여야 할 교실이 ‘놀 권리’를 잃어버린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아이들, 텅 빈 유아반의 슬픔
국가 수준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은 놀이를 통한 배움을 강조하지만, 현장의 시계는 거꾸로 흐릅니다. 만 3세가 되기 무섭게 아이들은 특별활동 선택의 폭이 넓은 곳이나 ‘종일반’이라는 이름의 영어학원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영유아 시기는 세상을 탐색하고 친구와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입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이득이라 믿습니다. 놀이터의 모래 한 줌, 화단의 풀잎 하나에도 행복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정든 선생님과 단짝 친구를 뒤로한 채 학원 셔틀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공교육의 본질을 지키려는 원장의 신념은 어느덧 경영난을 걱정해야 하는 무능으로 치부되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 특성화 교육의 역설: 쪼개진 시간과 '통제된 안전'이라는 함정
학부모들의 요구에 맞춰 특성화 수업을 즐비하게 늘어놓은 현상은 공보육의 근간을 흔듭니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놀이를 이끌어가야 할 시간은 외부 강사가 들어오는 분절된 수업 시간으로 쪼개집니다.
여기에는 부모님들의 깊은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엉켜 놀다 생길 수 있는 작은 상처나 사소한 다툼조차 견디기 힘든 '사고'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부모들은 역동적인 놀이판보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교재를 넘기는 학습식 환경을 ‘통제 가능한 안전지대’로 여깁니다.
하지만 갈등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이 안심이, 정작 아이들이 사회성을 기를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조용한 교실이 도리어 아이들의 마음 근육을 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진정한 ‘유아 중심’은 사라지고,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상품화된 학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 초등 준비라는 미명 하에 뺏어버린 ‘설렘’
부모님들은 말씀하십니다. “초등학교 가면 앉아 있는 연습부터 해야 하니, 지금부터 미리 시켜야죠.”
하지만 현장에서 지켜본 아이들은 어른들의 걱정보다 훨씬 강인하고 유연합니다. 스스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질서를 찾아내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초등 준비’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책상 앞에 가두는 사이, 아이들이 가져야 할 입학의 설렘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1학년 교실에서 느껴야 할 신기함과 호기심이, 이미 학원에서 다 떼고 온 ‘지겨운 복습’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선행 학습이 오히려 배움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을 미리 소진시키고, 정작 학교 문턱에 들어설 때쯤 아이들의 눈빛은 호기심을 잃고 냉소적으로 변해갑니다.
◇ 텅 빈 교실이 던지는 경고: “진짜 준비는 무엇입니까?”
학원 셔틀버스로 흩어진 텅 빈 유아반 교실은 우리 사회에 묻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가?”
초등 입학 전 무엇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아이들의 가장 빛나야 할 시간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공보육 현장에서 아이들이 밀려나는 현상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교육적 가치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관계 속에서 배우고 놀이 속에서 성장할 기회를 놓친 아이들의 가슴에는 배움의 즐거움 대신 경쟁의 피로감만 쌓여갑니다.
◇ 공보육의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대답해야 합니다. 교육의 본질을 지키려는 현장은 문을 닫고, 사교육시장의 축소판이 된 곳들만 살아남는 이 기형적인 구조를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입니까.
아이들은 상품이 아니며, 교실은 학원가기 전 머무는 대기소가 아닙니다.
텅 빈 교실에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채우려면 특성화 수업이 몇 개인지 묻기 전에 ‘우리 아이가 오늘 얼마나 행복하게 놀았고,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졌는가’를 먼저 묻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34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하며 제가 배운 진짜 교육이며,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공보육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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