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정 연못에 담긴 500년 세월, 봉화 닭실마을로 떠나는 시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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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 연못에 담긴 500년 세월, 봉화 닭실마을로 떠나는 시간 여행

나남뉴스 2026-06-10 12:03:14 신고

 

경북 봉화의 깊숙한 산골, 닭실마을을 찾으면 자연스레 한 인물이 떠오른다. 바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재영 작가 권석하다.

이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1982년 무역회사 주재원 신분으로 영국 땅을 밟았다. 런던과 구소련 법인을 이끌다가 1990년대 러시아 모라토리엄 사태를 겪은 후 런던에 뿌리를 내렸다.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칼럼니스트와 저술가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월간조선 등 여러 매체에 영국과 유럽 문화를 소개하는 글을 꾸준히 기고했다.

단순한 해외 체류 작가라는 수식어로는 그를 담아낼 수 없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현지인조차 취득하기 어렵다는 영국 예술문화역사 해설사 자격증 '블루 배지'를 그가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영국인보다 영국을 더 깊이 이해하는 한국인'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수많은 독자가 깊은 슬픔을 표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인생 궤적이다. 봉화 오지에서 시작해 러시아를 거쳐 런던까지 이어졌다. 두메산골 소년이 유럽의 정치와 역사, 건축과 문화를 해설하는 전문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의 딸 보라 씨 역시 영국 런던 해머스미스 앤드 풀럼 자치구에서 지방의원직을 수행한 바 있다.

◇ 500년 역사가 빚어낸 인재의 산실

닭실마을의 역사는 충재 권벌로부터 본격 전개된다. 1519년 기묘사화에 휘말려 벼슬을 내려놓은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았고, 이후 안동 권씨 문중이 약 5세기에 걸쳐 집성촌을 형성했다.

권벌의 후손 중에는 학문과 문장, 관직으로 명성을 떨친 이가 적지 않다. 권두인, 권두경, 권만, 권상원 등이 닭실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든 이들도 배출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자료에 따르면, 봉화 유곡리는 조선시대 관리와 문장가를 다수 배출했을 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도 많았던 지역이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한 유림단의 청원 운동, 이른바 '파리장서 사건'에 권상원이 동참했다. 경북 봉화 출신으로는 권병섭, 권상익 등 여러 유림이 서명에 이름을 올렸다. 3·1운동 직후 전국 유림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발송하려 했던 이 사건은 조선 지식인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 운동이었다.

겉으로는 고요한 산촌에 불과해 보이지만, 마을 안에는 조선 사림의 기억과 문중의 내력, 독립운동의 자취, 세계로 뻗어나간 현대 인물의 발자국이 켜켜이 쌓여 있다.

◇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의 명당

봉화읍에서 유곡리 방향으로 접어들면 낮은 산등성이가 마을 뒤편을 포근히 감싼다. 들판 건너편으로 기와지붕과 돌담이 시야에 들어오고, 마을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오래된 종가와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계포란형', 즉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옛 경상도 사람들이 닭을 '달구'라 불렀던 까닭에 주민들은 '달실'이라는 애칭도 쓴다. 충재 권벌 종가를 중심으로 고택과 정자, 서원, 유물관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골목길은 좁고, 낮은 담장 안쪽으로 기와집이 줄지어 늘어서며, 담 너머로 장독대와 마당이 얼핏 보인다. 대대적으로 관광지화한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집과 길, 밭과 산기슭이 여전히 삶의 터전으로 기능한다. 나른한 초여름 날씨 속에 논에는 늦모내기를 앞둔 모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논두렁 너머로 기와집들이 나란히 서 있고, 흙담과 벽체 위에는 불두화가 둥글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기와 끝에 걸린 흰 꽃송이를 바라보니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 절로 떠올랐다. 돌아온 고향이 예전 그대로일 수는 없지만, 어떤 풍경은 오래된 정서를 고스란히 불러일으킨다. 닭실마을의 초여름이 그러했다.

◇ 청암정, 마을의 가장 선명한 장면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청암정이다.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이 정자는 주변에 물이 고여 있고, 돌다리 하나가 바깥길과 정자를 이어준다. 바위와 물, 소나무와 처마가 단번에 눈에 담긴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자리가 빼어나다. 마루에 앉으면 연못 가장자리의 수목과 담장, 뒤편 산줄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청암정은 마을의 첫인상이 아니라 가장 또렷한 인상을 남기는 장소다. 정자 하나에 이 마을의 지세와 가문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청암정 일대에는 충재 권벌의 흔적이 이어진다. 종택은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충재박물관에는 문중에 전해 내려온 각종 자료가 소장돼 있다. 단순한 전통가옥 군락이 아닌,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인 셈이다.

◇ 물소리와 바위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석천계곡

석천계곡 방면으로 향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바위 틈새로 물이 흐르고, 계곡 곁에 석천정사가 자리한다. 충재 권벌의 장남 권동보가 아버지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자로 전해진다.

정자 아래로 물길이 지나고 주변에는 소나무와 암반이 펼쳐진다. 건물보다 물소리와 바위 배치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름에는 계곡 그늘이 시원하고, 가을이면 산자락의 단풍이 정자 주위를 물들인다.

이 마을 출신 권 작가의 생애 덕분에 닭실마을은 여느 전통마을과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오래된 터전이 인재를 길러 세상 밖으로 내보냈고, 그들이 다시 마을의 이름을 빛냈다. 산 아래 집과 정자가 단정하게 늘어서고, 정자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르는 구조—봉화의 깊은 산골에는 그런 마을이 아직 여럿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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