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붉은 집은 한 채의 건물처럼 서 있다. 허허벌판이나 낮은 언덕 위에 홀로 남은 연립주택을 닮았다. 정직성의 ‘붉은 집’은 24년 전 작가의 이름을 알린 ‘연립주택’ 연작을 현재의 자리로 불러낸다. 붉은 벽돌을 하나씩 쌓던 과거의 구축감은 검붉은 붓질과 단단한 실루엣으로 압축됐다. 정직성 개인전 ‘표석’은 풍납동 생활의 출발점을 알리는 전시다. 작가는 지난해 11월 거주지와 작업실을 풍납동으로 옮겼다. 마흔여덟 번째 이사였다. 이후 풍납동 공간지은에서 ‘풍납이사 MOVE BACK HOME’을 선보였다. ‘표석’은 그 다음에 놓인 전시다. 제목은 묘비를 뜻한다. 실제 전시장에는 글씨가 새겨진 35kg 시멘트 표석 3점이 나온다.
박정원 페이지룸8 디렉터는 정직성의 근작을 두고 큰 변곡점이라고 봤다. 3년 전 ‘매일매일의 만화경’ 개인전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정직성은 “헤드스톤”, “장소성”이라는 말을 자주 꺼냈다. 풍납동 이주 뒤 그 말들은 선명해졌다. 장소는 배경이 아니다. 정직성의 정신적·물리적 지형을 이루는 실제 좌표다. 풍납동은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둔촌동과 가깝다. 백제 시조 온조가 한강 유역에 세운 최초 도읍지로 알려진 ‘서울 풍납동 토성’에 있다. 풍납동 일대는 1960년대 이후 도시화됐다. 토성은 원래 높이 약 15m, 성벽 길이 약 3.7km로 추정된다. 현재는 높이 7~9m 안팎, 길이 약 2km 구간만 남았다.
박 디렉터는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해 풍납동 일대를 걸으며 ‘붉은 집’의 모티프가 된 연립주택들을 보았다 했다. 풍납백제문화공원과 역사관광도시 계획이 영향을 미친 일대 주거지는 도심의 빽빽한 연립주택과 달랐다. 한 채 전체가 사방에서 보였다. 건물은 밀집된 생활의 일부보다 독립된 덩어리에 가까웠다. 정직성의 붉은 집도 비슷한 형태다. 집은 정직성에게 주거지 이상의 이미지다. 초기 ‘연립주택’은 서울의 밀도, 노동, 도시인의 생활 감각을 회화로 끌어낸 작업이었다. 풍납동의 ‘붉은 집’은 과거 형식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오래전 연작을 지금의 장소와 감정 안에서 새로 세운다. 붉은색은 벽돌의 색이자 마음 안에 굳은 시간의 표식이다.
전시장에는 회화 외에도 서예, 시멘트 입체, 테라코타 두상이 등장한다. 낯설게 보일 수 있지만, 정직성이 이미 다뤄온 매체다. 2020년 홍성 이응노레지던시 입주 당시 도자와 서예에 몰두할 환경을 얻었다. 이후 조형 언어의 폭을 넓혔다. 2020~2021년 발표한 ‘가슴에 맺힌 편지’ 서예 연작, ‘슬픈 머리’, ‘반반머리’, ‘큰 머리’, ‘작은 머리’, ‘뚜껑 열린 머리’, ‘못생긴 사과머리’, ‘흰 머리’ 등 테라코타 두상도 그 갈래다. 지난해와 올해 제작한 머리들은 자소상, 가족, 가까운 친구를 모델로 삼았다. 얼굴은 초상인 동시에 감정이 굳은 덩어리다.
정직성은 2019년부터 자개를 회화의 언어로 끌어온 ‘현대자개회화’로 주목받았다. 공예 재료로 인식되던 자개는 파동, 기후, 기계 등 추상적 도상과 만났다. 화려한 표면 효과보다 재료가 품은 빛의 방향, 반복 패턴, 물성의 긴장이 중요했다. 자개장을 수집할 정도의 개인적 애호도 조형의 밑층에 있다. ‘표석’은 정직성 특유의 폭발적 추동이 잠시 속도를 낮춘 자리에서 태어난 전시다. 최근 3년간 겪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회화의 박자를 바꾸었다. 빠르게 뻗어가던 애호의 문화, 여러 매체에서 닦은 기량, 추상 회화의 에너지는 고통의 문턱에서 낮고 느린 유속을 얻었다. 자리에서 다른 생태가 생겼다.
표석이라는 상징은 현존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죽음을 기억하고 돌아보는 메멘토 모리에 가깝다. 한 사람이 지나간 뒤 남는 흔적, 애도처럼 떠오르는 기억, 극복과 되새김의 과정이 시멘트 덩어리 위에 새겨진다. 정직성은 자신이 딛고 선 땅이 무수한 사람이 지나간 임시 영토라는 사실도 환기한다. ‘봄눈 202601, 202602’, ‘봄산 202603, 202604’도 같다. 높은 산과 계절의 표정조차 영원하지 않다. 작가는 자연의 이미지로 사라짐과 남겨짐의 감각을 은유한다. 표석은 죽음을 향한 기호보다 삶의 자리를 되짚게 하는 장치다. 어디에 머물렀고, 누구를 떠나보냈으며, 무엇을 마음에 새겼는지 묻는 물리적 표식이다.
정직성은 최근 유년기를 보낸 장소로 돌아와 살며 어린 시절을 마주했고, 긴 시간을 나눈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일을 겪었다고 밝혔다. 그는 “덩어리로 뭉쳐 응어리지려는 감정들을, 내가 가진 재주로 나름의 예를 갖춰 인정하고 표현하여 흘러가도록 하고 있다”고 적었다. 출품작을 “사라지는 것들, 다시 볼 수 없지만 내 마음에 큰 흔적을 남긴 것들을 기리고 새겨 표석으로 남기고 내 마음에는 응어리로 남지 않도록 하는, 극복과 정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감정은 회화가 되고, 회화는 물질이 된다. 표석은 마음의 응어리를 흘려보내기 위한 형식이다.
정직성은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고, 2005년 같은 대학원 서양화 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서양화·판화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23년 KIAF 하이라이트 20 선정작가로 이름을 올렸고, 2021년 종근당 예술지상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표석’은 정직성의 풍납동 시절을 여는 전시다. 붉은 집은 과거의 연립주택을 부른다. 시멘트 묘비는 사라진 사람과 장소를 향한 감정을 새긴다. 회화, 서예, 자개, 테라코타, 표석은 서로 다른 물성을 갖지만 한 방향으로 향한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위한 정화의 형식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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