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몸은 언제나 아름다움의 기준 앞에 섰다. 어느 문화권에서는 긴 목이 미의 표준이 됐다. 어느 시대에는 풍만한 육체가 풍요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조각처럼 단련된 근육, 곧게 뻗은 선, 균형 잡힌 비례도 인간이 품어온 오래된 욕망의 일부다. 신현지 B PROJECT의 컨템포러리 발레 '휴먼(HUMAN)'은 욕망을 바깥에서 찬미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육체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출발해 몸 안에 담긴 정신과 존재의 근원을 파고든다.
안무가 신현지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문장에서 작품의 첫 질문을 얻었다. 성서의 문구는 종교적 설명으로 닫히지 않는다. 예술가가 상상하는 가장 순수한 몸의 형태를 향한 물음으로 바뀐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면, 태초의 몸은 어떤 선과 호흡을 가졌을까. 발레로 훈련된 육체는 신체의 기교만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이상을 향해 다가가려는 갈망의 표면이 된다. 'HUMAN'은 탄생, 본성, 관계, 죽음이라는 네 단계를 따라간다.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이어 몸 안에 새겨진 정신과 원초적 충동을 들여다본다. 사랑이라는 불완전한 관계를 지나서 죽음의 문턱에서 또 다른 시작을 감지한다. 각 파트는 독립된 주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체로 보면 한 존재가 태어나 흔들리고 사랑하고 사라지는 시간의 궤적이다.
첫 번째 파트 ‘탄생’은 태초의 형상을 묻는다. 발레의 기본 자세가 지닌 수직성과 균형은 막 태어난 몸의 불안정함과 충돌한다. 곧게 세우려는 힘과 쓰러지려는 감각,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움직임이 교차한다. 인간의 첫 상태를 상상하게 한다. 완성된 몸보다 형성되는 몸, 이미 정리된 아름다움보다 막 생겨나는 생명감이 앞선다. 두 번째 파트 ‘본성’은 육체 안쪽으로 들어간다. 몸은 외형만 남기지 않는다. 반복 훈련으로 단단해진 근육, 관절의 각도, 호흡의 밀도, 버티는 시간은 정신의 흔적으로 읽힌다. 신현지는 발레의 선을 장식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본능과 자제, 욕망과 절제 사이의 긴장으로 밀어간다. 발레의 우아함은 편안한 아름다움보다 더 불안한 물음으로 변한다.
세 번째 파트 ‘관계’에서는 사랑이 등장한다.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관계로 불린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불완전한 상태다.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몸은 늘 어긋남을 품는다. 하나가 되려는 욕망은 각자의 결핍을 남긴다. 듀엣의 접촉과 거리, 들어 올림과 미끄러짐, 마주 보는 자세와 어긋나는 방향은 이상적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을 드러낸다. 네 번째 파트 ‘죽음’은 몸의 몰락을 다룬다. 발레가 흔히 상승과 도약의 예술로 기억된다면 'HUMAN'은 내려앉는 몸에도 주목한다. 무너짐은 존재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문턱이다. 육체가 힘을 잃는 순간, 인간을 인간답게 했던 정신과 감각은 다른 방식이다. 죽음은 끝의 이미지보다 새 출발을 예고하는 정지에 가깝다.
핵심은 ‘아름다운 몸’을 향한 솔직한 고백에 있다. 무용수 출신 안무가에게 몸은 평생 다듬어온 재료이자,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다. 조각상처럼 벼린 신체는 무대 위에서 욕망의 대상이 된다. 작품은 외형의 완벽함에 취하지 않는다. 껍데기를 찬미하는 시대에 몸의 표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다시 묻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다. 닿을 수 없지만 바라보게 되는 완전한 미, 예술가가 끝내 모방하려는 이상, 현실의 몸이 계속 미끄러지면서도 향하는 높은 기준이 작품 전체를 움직인다. 신현지의 발레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 완벽한 형상에 이르려는 욕망이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역설을 받아들인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출신 신현지가 이끄는 민간발레단체 신현지 B PROJECT는 발레의 기본 언어를 유지하면서 현대 사회의 심리와 정서를 무대로 옮겨왔다. 클래식 발레가 가진 선명한 기초 위에 컨템포러리한 움직임을 더했다. 인간 중심의 감각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HUMAN'은 방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에 가깝다. 신현지는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로 무대에 섰고, 이후 안무가로 작업 반경을 넓혔다. 현재 신현지 B PROJECT 대표이자 중앙대학교 강사로 활동한다. 2015년 한국발레협회 신인안무가전 신인안무가상, 2024년 한국발레연구학회 한국발레아카데미상, 2025년 한국발레협회 공연예술 공로상 수상 이력도 갖고 있다.
객원무용수 김소혜, 류형수, 문소윤, 윤오성, 이윤희, 이충훈은 작품의 네 단계를 몸으로 이어간다. 탄생의 원초성, 본성의 긴장, 관계의 갈망, 죽음의 침묵은 각각 다른 신체 언어를 요구한다. 발레의 기교는 기교 자체로만 남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절박한 방식으로 쓰인다. 몸은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생의 압력과 감정의 잔상을 직접 떠안는다. 제16회 대한민국발레축제는 고전 발레와 창작발레, 컨템포러리 발레의 현재를 나란히 보여주는 자리다. 신현지 B PROJECT의 무대는 민간 발레단체가 발레 어법으로 어떤 사유를 밀고 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사례다. 대규모 레퍼토리의 장관과 다른 방식이다. 소극장 무대는 몸의 세부와 관계의 밀도를 가까이 한다.
대형 무대의 화려함보다 관객과 무용수 사이의 거리가 중요한 극장이다. 호흡, 근육의 떨림, 이동의 방향, 접촉 직전의 긴장까지 선명하다. 'HUMAN'이 말하는 몸의 시는 밀도에서 힘을 얻는다. 인간을 추상적 개념으로 다루는 대신에 눈앞의 몸이 버티고 흔들리는 방식으로 감각하게 한다. 결국 'HUMAN'은 인간을 설명하려는 공연이 아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나아가는 동안에 몸이 어떻게 아름다움의 욕망을 품고, 관계 속에서 상처를 얻으며, 끝의 문턱에서 새 의미를 감지하는지 묻는 작업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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