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연극은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드러내는 예술이지만, 그중에서도 연극집단 반이 창단 3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예외와 관습'은 판단의 구조 자체를 해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작품은 사건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기준과 사고의 틀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관객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판단을 구성하는 주체로 호출된다. 이때 연극적 경험은 감상의 차원을 넘어 현실 인식의 문제로 확장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구축한 서사극은 감정 이입을 유도하기보다 인식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데 목적을 둔다. 이번 공연 역시 그 원칙을 견지하면서, 음악과 코러스, 움직임을 결합해 감각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구조를 완성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관객을 이야기로부터 밀어내는 동시에 다시 끌어당기는 이중적 장치로 작동하며, 익숙한 현실을 낯선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연극집단 반이 '예외와 관습'을 30주년 기념 프로젝트로 택한 선택은 방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과거의 성취를 기념하는 행위가 아니라, 연극이 사회적 발언으로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단체는 축적된 시간의 무게를 서사화하기보다, 현재의 구조적 모순을 직면하는 태도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은 연극이 여전히 공적 담론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믿음과 맞닿아 있다.
무대와 객석의 관계 역시 재편된다. 재판 장면에서 관객은 판단의 주체로 호명되며, 연극적 공간은 하나의 사회적 실험실로 변모한다. 관객은 인물들의 행위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결론을 스스로 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공연을 참여적 경험으로 확장시키며, 개인의 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는 순간을 체감하게 만든다.
작품의 중심에는 ‘관습’이라는 개념이 자리하지만, 그것은 안정된 질서가 아니라 폭력을 내면화한 구조로 드러난다. 상인 카알 랑그만과 짐꾼 쿨리의 관계는 자본과 노동, 권력과 종속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결과물로 제시된다.
상인의 행위는 극단적이지만, 그 논리는 익숙하다. 상인은 자신의 행동을 생존 전략으로 설명하며, 상황적 합리성을 근거로 책임을 회피한다. 이때 작품은 개인의 선택을 도덕적 차원에서만 다루지 않고, 그 선택이 형성되는 구조적 조건을 함께 드러낸다. 책임의 문제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재구성된다.
이 서사는 오늘의 현실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경제적 격차와 경쟁 중심의 질서가 심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행위는 효율성과 생존의 논리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고통은 배제되거나 축소되며, 폭력은 제도와 관습의 이름으로 반복된다. 작품은 이러한 구조를 노출시키며,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브레히트의 극작 방식은 감정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비판적 사고로 전환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번 공연에서 음악과 코러스는 감각적 몰입을 유도하는 동시에, 그 몰입을 끊어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리듬과 유머, 신체적 움직임이 결합된 무대는 관객을 끌어들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이 긴장 속에서 사고는 더욱 선명해진다.
연출을 맡은 김지은은 브레히트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이를 동시대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주력했다. 과거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서사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 겹쳐지며, 인물들의 선택은 낯설지 않은 현실로 다가온다. 이로 인해 작품은 시간적 거리를 지우고,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는 이야기로 변환된다.
배우 남성진의 참여는 이러한 구조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든다. 그는 중심 인물로서 서사의 긴장을 유지하며, 관객의 판단을 끊임없이 흔든다. 그의 연기는 감정의 전달을 넘어, 판단의 기준을 교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서울 공연 첫 참여라는 점에서도 그의 존재는 작품의 의미를 확장한다.
무대 위 인물들은 각자의 규범과 논리를 기반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 규범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이라기보다, 사회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결과물이다. 작품은 이 구조를 해체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가치 체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직선적이지 않다. 관객은 사건을 따라가며 여러 차례 판단을 수정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준이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체감한다. 인물들의 행위는 이해와 비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명확한 해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브레히트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럽은 계급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사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갈등은 보다 은폐된 형태로 지속된다. 계급이라는 명칭은 희미해졌지만, 권력과 자본의 작동 방식은 더욱 정교해졌다.
오늘의 한국 사회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 있다. 불평등은 제도와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개인의 선택은 구조적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며, 우리가 따르고 있는 규범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연극집단 반은 이번 공연을 통해 레퍼토리 작품 개발이라는 장기적 계획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이는 과거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의미를 갱신하며 지속 가능한 공연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다. 이러한 접근은 연극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동시에, 관객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무대가 끝난 이후에도 작품은 마음 속에서 계속 작동한다. 관객은 자신이 내린 판단과 그 근거를 재구성하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조정하게 된다. 이 연극은 감상을 넘어, 현실을 인식하는 틀 자체를 뒤흔드는 힘을 지닌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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