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김희준 기자= “아름다운 축구가 실종됐다.” 월드컵만 5번을 취재한 영국 베테랑 축구 기자 제이슨 버트가 영국의 유서 깊은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의 첫 머리다. 그는 아름다운 축구가 사라진 원인으로 비디오 판독 기술과 함께 세트피스를 꼽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PL)가 세계 최고의 리그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정적 규모에서는 한때 유럽 빅클럽들이 추구하던 ‘슈퍼리그’에 가닿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PL은 올 시즌 여름과 겨울 이적시장을 합쳐 총 40억 5,000만 유로(약 6조 9,280억 원)를 퍼부었다. PL을 제외한 유럽 5대 리그 이적료 지출 총합인 39억 1,901만 유로(약 6조 7,024억 원)보다 많다. 천문학적인 중계권료 수입과 이를 최대한 균등하게 분배하는 시스템이 조화를 이루면서 PL 전체의 성장이 이뤄진 덕이다.
그래서 PL은 가장 흥미로운 리그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10시즌 동안 맨체스터시티가 6번 우승하는 등 강팀은 여전히 강팀이지만, 그 사이 중위권 팀들도 많이 성장했다. 브렌트퍼드, 브라이턴앤드호브앨비언을 필두로 한 데이터 기반 스카우트 전문 팀이나 애스턴빌라, 풀럼, 본머스 등 명장의 힘을 빌린 팀, 에버턴처럼 과거의 성공 방식을 재현한 팀까지 다양한 색채를 가진 팀들이 PL에 즐비하다.
그런데 최근 영국 현지에서는 PL이 이전보다 재미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트피스가 강력한 득점 무기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세트피스의 효율성이 재발굴되고, 강팀에도 결정적 한 방이 될 수 있다는 게 발견되면서 세트피스에 의존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까지 PL에서 나온 세트피스 득점은 총 215골이다. 전체 득점의 27.5%에 달하는 높은 수치다. 유럽 5대 리그 중에서는 2위인 이탈리아 세리에A의 24%와도 격차가 있다. 최근 10년을 기준으로 해도 2016-2017시즌 23.9%보다 훨씬 비중이 크다.
그중에서도 코너킥 상황에서 골키퍼를 방해하는 수위에 대한 논쟁이 거세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견제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반칙이 불리지 않는 게 이상한 경우도 종종 나온다. 일례로 아르네 슬롯 리버풀 감독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서는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이 취소되거나 골키퍼 파울이 선언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는 골키퍼 얼굴을 때려도 심판이 계속 진행하라고 한다”라며 그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에버턴의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 역시 “코너킥에서 블로킹이 중요한 요소가 됐다. 스타일까지 갖춰 블로킹을 가장 잘하는 팀은 아스널”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흐름은 PL에서 브렌트퍼드가 선도하고 아스널이 유행시켰다고 봐야 옳다. 브렌트퍼드는 데이터 기반 스카우트 시스템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못지 않게 세트피스 전술을 갈고 닦는 팀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오로지 세트피스만 놓고 본 선임은 아니겠으나 올 시즌 토마스 프랑크 감독의 공백을 메운 인물이 세트피스 코치였던 키스 앤드류스라는 게 브렌트퍼드에서 세트피스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코너킥에서 골키퍼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전술도 브렌트퍼드가 본격적으로 도입했으며, 현재는 마이클 카요데를 필두로 한 롱스로인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아스널은 브렌트퍼드가 추구하는 세트피스를 가장 완성도 있게 구현한 팀이다. 때마침 재료들이 훌륭했다. 문전으로 정확한 코너킥을 배달할 수 있는 데클란 라이스와 부카요 사카, 강력한 제공권으로 득점할 수 있는 가브리에우 마갈량이스, 마갈량이스에게 쏠린 시선을 분산할 만한 득점력을 지닌 윌리엄 살리바와 위리엔 팀버르 등을 모두 보유했다. 즉 아스널은 코너킥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들을 고루 갖춰 브렌트퍼드가 추구했던 전술을 완벽에 가깝게 경기장에 펼쳤다고 보면 된다.
세트피스의 중요도가 높아진 부작용으로 ‘인플레이 시간’ 즉 실질적으로 경기가 진행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올 시즌 PL에서 실질적인 경기 진행 시간은 55분 27초에 불과했다. 90분 기준으로 55.2%이며, 2009-2010시즌 이후 최저 수치다. 추가시간 부여가 엄청나게 되는 현실에도 오히려 인플레이 시간이 줄었다. 비디오 판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PL 팀들도 이러한 ‘시간 낭비’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은 세트피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혹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을 멈췄다.
당연히 경기를 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세트피스를 얄미울 정도로 활용하는 팀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올 시즌 아스널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과도한 골키퍼 방해로 이미 몇 차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첼시와 경기에서는 수비수들과 끌어안는 수준으로 격한 몸싸움을 했고, 이를 통해 코너킥으로만 2골을 넣어 2-1 승리를 거뒀다. 골키퍼 방해는 없었어도 현지에서는 여전히 아스널의 접근법에 대한 갑론을박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게 특정 팀의 잘못이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축구계에는 ‘심판 성향 파악’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심판이 어떤 반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빠르게 알아내 경기에 교묘하게 활용하는 건 미덕에 가깝다. 아스널은 올 시즌 PL 심판들이 골키퍼 방해에 관대하다는 걸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팀이다. 다른 팀들도 아스널과 비슷한 플레이로 비슷한 효과를 본다. PL 시스템에도 책임이 있다는 방증이다.
영국 ‘BBC’도 이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PL의 높은 반칙 기준 때문에 골키퍼 등을 방해하는 행위는 대부분 허용된다”라며 “코너킥 직전 선수들이 서로를 던지는 행위를 막으려면 법 개정이 정말로 필요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건 PL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라며 지금 PL에서 나오는 세트피스 흐름이 오직 PL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일 수 있음을 짚었다.
최근 영국 현지에서는 세트피스 공격 상황에서 발생하는 몸싸움과 세트피스가 야기하는 경기 질 저하에 대한 우려가 꾸준히 제기된다. 프로라면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고, 궁극적인 해결은 PL이 더욱 엄격하게 골키퍼 방해를 제한하는 등의 시스템 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홈페이지 캡처,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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