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에 밑줄을 긋거나 훼손했을 경우 일부 해외 국가는 엄격한 제재와 함께 체계적인 사전 예방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반면 국내는 주로 현물 변상과 이용 제한 등 사후 조치에 무게를 두는 구조여서 제도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배우 김지호의 공공도서 훼손 논란을 계기로 "처벌 중심 대응을 넘어 어린 시절부터 공공재 인식을 키우는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난 23일 배우 김지호는 공공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을 긋고 그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다가 사과했다. 김지호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반납을 미루고 드디어 읽어냈다"며 짧은 감상평을 덧붙인 인증 글을 올렸다. 게시물 내에는 공공 도서관 라벨이 붙은 김훈 작가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표지와 김지호가 밑줄 그은 부분들이 확대돼 첨부돼 있었다. 이를 두고 김지호를 두고 온라인상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도서관 책은 엄연한 공공 자산인데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캡처돼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 퍼졌다. 일부 네티즌은 "도서관 책에 줄을 긋는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나", "변상해야 한다", "도서관 책도 엄연한 공공재인데 무슨 짓이냐", "저걸 자랑이라고 SNS에 올리기까지 하다니 대단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김지호는 "저의 조심성 없는 행동으로 불편을 느끼셨을 분들께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어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 제 책에 하던 습관대로 밑줄을 긋고 말았다"며 "누군가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잘못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해당 도서는 새 책을 구입해 도서관에 제공하거나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교체하겠다"며 "간혹 부주의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신중히 행동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지호가 사과와 함께 후속 조치를 밝힌 이후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과거 게시물에서 공공도서관 도서로 보이는 책에 필기 흔적이 남아 있는 사진이 다시 조명되면서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이전 독서 인증 사진들에서도 도서관 책으로 추정되는 도서에 밑줄이 그어진 모습이 포착됐고 책 옆에 필기도구가 놓여 있거나 손에 볼펜을 든 채 촬영한 사진도 확인됐다. 이에 일부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일회성 실수가 아니라 상습적인 행동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르데스크 취재 결과 도서관 서가에 비치된 일부 도서에는 이미 빨간색이나 검은색 볼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특정 문단이 표시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용자들이 반복적으로 책을 대출·반납하는 과정에서 훼손이 누적되고 있는 셈이다.
도서관 이용객 이윤지 씨(43·여)는 "오래된 책을 보다 보면 낙서가 돼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그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책을 읽고 그 책에서 감명을 받은 부분에 사람들이 남겨둔 표시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느낌이라서 요즘은 오래된 책들은 빌려서 보기보다 직접 사서 보거나 도서관에서 만큼은 비교적 새 책 위주로 찾아 읽게 된다"며 "공공도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보는 만큼 기본적인 이용 예절이 지켜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공공도서관은 대체로 현물 변상을 원칙으로 한다. 대출자가 책에 밑줄을 긋거나 훼손했을 경우 동일 도서로 교체하거나 절판 등의 이유로 똑같은 책 구입이 어려울 경우 이에 상응하는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다수 공공도서관 이용 규정에도 자료 훼손 시 원상복구 또는 변상 조항이 명시돼 있다. 여기에 일정 기간 대출 정지나 회원 자격 제한 등 행정적 제재가 뒤따른다.
고의성이 뚜렷하거나 상습적인 훼손의 경우 형법상 재물손괴죄 적용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중대한 사례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편이다. 이에 전반적으로는 훼손 발생 이후 책임을 묻는 사후 조치 중심 구조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도서관에서는 방학 기간 청소년을 대상으로 낙서 제거 봉사활동을 운영하는 등 복구 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전국 단위의 체계적인 예방 교육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사전 예방 교육부터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다. 적발될 경우 벌금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사전 예방에 보다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의 경우 초등학교와 연계한 도서관 체험 수업을 통해 자료를 다루는 방법과 공공재 개념을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영국의 국립도서관인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을 중심으로 'Respect the Book' 캠페인을 전개하며 도서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 도서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뉴욕 공공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NYPL)은 어린이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회원 가입 단계에서부터 도서관 이용 규칙과 자료 관리 방법을 안내하며 공공재로서의 도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교육한다.
또한 뉴욕주 내 학교들과 연계해 독서 프로그램과 도서관 체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체험 수업에서는 도서 대출 절차뿐 아니라 책을 훼손하지 않고 사용하는 방법, 공동 자산을 존중하는 태도 등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단순히 규정을 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공공재 인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운영 방식이라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공공도서 훼손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부주의로만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공공도서는 세금으로 조성된 공동 자산이라는 점에서 일반 소비재와 다르다"며 "공공재 소비 역시 '책임 있는 소비'의 영역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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