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칼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① 언어의 한계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응 작가] 지난 글에서 우리는 언어가 가진 한계를 확인했다. 내 안의 감각이 너무 선명한데도, 그것을 말로 옮기는 순간 본질이 훼손될까 조심스러워진다. 왜곡될 것을 알면서도 말을 내뱉는 일과, 침묵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서성인다.
예술가란 이 딜레마 위에서 자신만의 보폭으로 ‘제3의 소통’을 닦아 나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순간을 작가 고유의 문법-기법이나 태도-으로 견뎌내는 과정이며, 언어가 닿지 않는 지점을 기어이 통과하려는 실천이 결국 작품이 된다고 믿는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다루는 영역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사실을 전달하는 ‘말하기(saying)’이고, 다른 하나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는 ‘보여주기(showing)’다. ‘말하기’가 설명서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이라면, ‘보여주기’는 슬픔을 정의하는 대신 슬픔의 무게를 직접 마주하게 하는 방식이다. 논리가 설명을 멈춘 지점에서 예술은 그 실체를 우리 앞에 세워두고 말로 다 옮길 수 없던 진실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초기 관점은 생애 후반에 이르러 삶의 맥락 속에서 수행되는 ‘언어 게임’이론으로 확장된다. 언어란 고정된 규칙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변하는 유연한 도구라는 뜻이다. 이 게임 안에서 단어들은 하나의 명확한 정의로 묶이지 않는다. 마치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조금씩 닮아있듯, 느슨한 공유 지점을 통해 서로의 의미에 기대어 존재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가족 유사성’이라 불렀다.
단어들이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며 닮아있다면, 우리가 겪는 소통의 오류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언어 구조 자체가 품고 있는 필연적인 성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술은 언어에 의해 분절된 이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2021년 진행했던 나의 개인전 ‘완벽한 오해’를 소환하려 한다. 이 전시는 우리가 소통이라 믿었던 행위가 실은 ‘정교하게 중첩된 오해’일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전시의 흐름을 관통하는 두 점의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예술만의 방식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자 한다.
삶, 사람, 사랑
작품 ‘삶, 사람, 사랑’은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오해’를 시각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삶이라고 타자를 치면 자꾸 사람이라고 오타가 난다”는 이병률 시인의 문장에서 출발했다.
실제로 자판을 두드려보니 ‘삶’과 ‘사람’은 물리적으로 무척 가까워 오타가 나기 쉬운 구조였다. 나는 백스페이스를 눌러 오타를 수정하는 대신, 그 곁에 ‘사랑’이라는 유사한 오타를 하나 더 놓는다. 첫 번째 오타가 도구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실수라면, 두 번째 오타는 그 한계를 소통의 형식으로 수용한 능동적 선택이다. 정답(이해)으로 되돌아가기를 잠시 미루고, 오타 위에 오타를 덧쓰는 행위는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기꺼이 오해를 경유하겠다는 역설적인 의지이기도 하다.
‘삶’, ‘사람’, ‘사랑’이라는 세 단어는 비스듬히 닮아있으면서도 같지는 않다. 이 아슬한 중첩 상태를 통해 이해라는 환상을 쫓는 대신 서로의 오해를 끈질기게 쌓아 올리며 그 틈새를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소통의 실체가 아닐까 가늠해 본다.
이야기소묘
글자 하나를 잘못 눌러 ‘삶’이 ‘사람’이 되듯, 본래의 의도가 어긋나는 순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작업 ‘이야기소묘’는 의미가 끊임없이 어긋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그 오해의 끝에서 마주하는 기적 같은 일치를 다룬다.
이 작업의 모티브는 1990년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가족오락관’의 ‘고요 속의 외침’이다.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소리가 차단된 채 앞사람의 입 모양만 보고 단어를 유추해 전달하는 이 게임의 방식은 소통이 지닌 구조적인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저마다의 감각과 언어라는 장벽에 갇힌 채, 타자의 진의를 필사적으로 유추하며 살아가야 하는 대화의 실상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구조 속에서 처음 전달된 단어는 여러 사람을 거치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수많은 왜곡을 거친 마지막 주자가 처음의 정답을 맞히는 순간이 생긴다. 앞사람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앞선 오해를 다시 한번 오해함으로써 빚어진 ‘우연한 일치’에 가깝다. 오류와 왜곡이 겹겹이 쌓여 역설적으로 원형에 가닿는 이 상태를 나는 ‘완벽한 오해’라 이름 붙였다. 완벽한 이해란 불가능한 환상일지 모르나, 끊임없이 오해를 연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처음의 의도와 기적처럼 맞닿기도 하지 않을까?
소통이란 나의 의미와 너의 의미를 포갰을 때, 끝내 포개지지 않는 여백을 다독이고 그 여분의 자리를 매만지는 과정이다. 그렇게 서로의 오해를 끈질기게 쌓아 올리다 보면 어느새 ‘유사-이해’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비록 징검다리는 어긋나 있고 조각나 있지만, 우리가 불완전한 언어를 들고서라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이유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 소통을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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