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연극은 언제나 ‘지금’을 비추는 가장 오래된 예술이다.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가 신예라면, 그 ‘지금’은 곧 ‘미래’이기도 하다. 김수로 대표가 이끄는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의 문화 나눔 프로젝트 ‘연극학교’ 12기 배우들이 김수로 Curated 21 연극 ‘와이프’로 관객과 만난다. 상업 공연장과는 결이 다른 이 공간에서, 젊은 배우들은 자신의 첫 문장을 또박또박 써 내려간다.
2014년 1기로 출범한 연극학교는 교육 프로그램에 머물지 않는다. 전국 연극영화과 학생들에게 프로덕션 시스템 속 실제 공연 경험을 제공하며 ‘현장형 배우’를 길러내는 실험장이자 인큐베이팅 플랫폼이다. 이 프로젝트가 지닌 미덕은 ‘기회’의 민주화에 있다. 오디션과 캐스팅의 문턱은 높고, 무대 경험은 곧 배우의 자산이 되는 현실 속에서, 연극학교는 연습실과 공연장을 연결하는 통로를 열어왔다. 문화 생태계에서 ‘발굴’이란 단어가 상투어처럼 소비될 때, 이 프로젝트는 그 의미를 구체화한다.
이번에 무대에 오르는 작품 ‘와이프’는 2019년 영국 극작가 Samuel Adamson이 발표한 문제작이다. 작품은 Henrik Ibsen의 고전 'A Doll's House' 이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노라가 문을 닫고 나간 이후, 여성은 어떤 시간 속을 통과해왔는가. 1959년부터 2049년까지 시대를 가로지르는 이 서사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인 여성들의 사랑과 선택을 병치하며, ‘아내’라는 호칭 바깥의 존재를 질문한다.
국내 초연 당시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등 주요 시상식에서 연극 부문을 휩쓸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그러나 ‘와이프’의 진짜 힘은 수상 경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작품이 다루는 ‘시간의 감각’에 있다. 20세기 중반의 억압, 21세기 초의 혼란, 그리고 근미래의 상상까지 연극은 사랑과 결혼, 성소수자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동해왔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사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 구조의 결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사실을 무대 위에서 증명한다.
연출은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신유청이 맡았다. 그는 연극 ‘튜링머신’, ‘시련’, ‘그을린 사랑’, ‘엔젤스 인 아메리카’ 등에서 텍스트의 지층을 파고드는 연출로 주목받아왔다. 특히 인물의 내면과 시대적 맥락을 병치하는 데 능한 그는, 이번 ‘와이프’에서도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 구성을 통해 관객을 ‘관람자’가 아닌 ‘목격자’로 초대한다. 연극이란 장르가 본래 지닌 공동체적 속성을 적극적으로 환기하는 방식이다.
문화적으로도 ‘와이프’의 의미는 분명하다. 작품은 여성 서사를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관점의 이동’을 요구한다. 과거에는 금기였던 사랑이 오늘날에는 권리의 문제로 재정의되고, 가족의 형태 역시 단일한 모델을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받는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선택의 무게를, 연극은 다양한 시간의 위에 올려놓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신예’들이 나선다는 것이다. 수잔나, 데이지, 피터, 로버트, 에릭, 마조리 등 여러 인물을 맡은 12기 배우들은 역할을 나눠 맡으며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조합한다. 한 배우가 두 인물을 겸하는 구조는 정체성의 다층성을 암시하며, 시대를 건너는 서사의 리듬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위험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가능성이다. 선입견 없는 해석, 과감한 에너지, 그리고 지금 세대의 감각이 작품에 새로운 결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계는 늘 ‘위기’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된다. 관객 감소, 제작비 상승, 플랫폼의 다변화 속에서 무대 예술은 치열한 생존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시기일수록 새로운 얼굴의 등장은 더욱 중요해진다. 세대 교체는 단절이 아니라 축적 위의 확장이다. 연극학교 12기 배우들이 서는 이번 무대는 개인의 데뷔가 아니라, 한국 연극의 다음 페이지를 예고하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2월 25일부터 3월 3일까지 현대카드 UNDERSTAGE에서 펼쳐지는 연극 ‘와이프’는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가족으로 불리기 전에 한 사람의 존재로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마음을, 시대를 건너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화두로 꺼내든다. 젊은 배우들이 새 목소리로 발화하는 무대는 우리 사회의 현재 좌표를 비추는 거울이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문화적 이정표로 자리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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