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김태이 작가] 조금도 명확하지 않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세상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일어서 걷는 법을 까먹을 것 같다고 느낄 때쯤 의식적으로 집을 나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나를 요즘은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예전엔 전혀 그런 생각조차 하지도, 들지도 않았건만 이제 슬슬 내게 뭐가 좋은지에 대한 정보가 꽤 쌓였던 것 같다. 내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는 작은 방은 지표면과는 꽤 떨어져 있는 편이라, 세상 소리를 실감나게 듣기 위해선 내려가 나가야 했다.
입춘 때 잠깐 온기가 돌았다가 그 다음 날부터는 흐린 날들이 이어졌다. 금세 다시 눈이 쏟아질 것처럼 추워져, 새삼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떻게 그 시기를 그렇게도 정확히 짚어냈을까. 잠시 산책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공기는 심상치 않게 차가웠고, 그렇다고 다시 그 좁은 방으로 돌아가자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내려온 수고가 괜히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입구 앞에서 멍하니 숄을 두르고 눈앞 지표면과 맞닿은 것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곳에서는 내가 13년 전 서울에 처음 올라와 살던 임대아파트가 작게 내려다보였다. 한때는 허름하다고만 여겼던 이 동네가 이제는 꽤 괜찮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그 시절의 나는 모든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여겼지만, 어느새 나도, 거리도, 나무도, 새와 고양이도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실려, 봄이 올 것만 같은 냄새가 스쳤다. 서 있는 자리에서 내 발바닥이 단단해진 것 같았다. 집안 사정으로 해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사를 반복하던 유년과 청소년기를 오래도 지나왔다. 이제야 비로소 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감각. 예전의 나는 늘 떠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네의 계절이나 나무의 자람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번 떠나면서도 무언가를 남겨두고 왔다는 걸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시간들, 완전히 끝내지 못한 인사들,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애착 같은 것들… 과거의 조각 조각이 나를 바라보며 머무르는 시간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방울 같은 것이 뺨에 닿았다. 눈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스치면 알고 있어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희석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싸락눈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는 늘 이런 식이다. 되다만 눈, 오다 마는 눈, 완전히 쌓이지도 못한 채 흩어지는 눈. 차가운 공기, 차가운 바람, 차가운 눈. 그러나 그 끝에는 그 누가 말려도 결국 봄이 오기 마련이다.
이곳에서 여러 차례 계절을 겪으며 나는 처음으로 반복을 체감했다. 계절은 되풀이되지만, 나는 매번 같지 않다. 한 차례, 그리고 한 차례가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한 자리에서 바라본 시간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반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나를 겪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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