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교실 끝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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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춘추] 교실 끝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경기일보 2026-02-22 19:1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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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문을 열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먼저 번진다. 그 웃음소리가 비켜가는 한편, 창가 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아이가 있다. 고려인 청소년이다. 부모의 삶을 따라 한국에 왔지만 아이에게 이곳은 아직 ‘적응해야 할 세계’다. 칠판의 글씨는 읽을 수 있어도 문장 속뜻과 교사의 농담까지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한 중학교 교사는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늘 수학 점수가 낮던 학생이 있었다. 계산이 느린 줄 알았는데 실은 문제의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풀이 과정은 맞았지만 서술형 답안을 쓰지 못해 점수를 잃었다. 언어의 장벽이 배움의 장벽이 된 사례다. 급식시간마다 혼자 밥을 먹던 그 아이는 “말을 잘못하면 웃음거리가 될까 봐 무서웠다”고 털어놓았다. 배움의 어려움은 관계의 위축으로, 관계의 위축은 다시 자존감의 상처로 이어진다.

 

또 다른 고등학생의 사례도 있다. 러시아에서 문학을 좋아하던 학생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국어시간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시의 은유를 이해하지 못해 발표를 포기했고 진로 상담에서는 “꿈이 없다”고 적었다. 그러나 방과 후 러시아어 독서 모임에 참여한 뒤 표정이 달라졌다.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정리하고 토론하는 경험이 쌓이자 한국어로도 조금씩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는 언어의 뿌리를 다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러시아어 등 모국어 수업을 통해 언어 구조와 사고의 틀을 세울 때 한국어 습득 또한 훨씬 빨라진다. 자기 언어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가장 단단한 디딤돌이 된다. 이중언어는 결핍이 아니라 자산이다.

 

이를 위해 교육 제도권의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다. 학습 한국어 교육을 정규과정과 연계하고 모국어 교육을 선택과정이나 방과후 수업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지역사회 역시 학교와 고려인 공동체를 잇는 통역·상담 지원, 또래 멘토링과 문화 이해 프로그램을 촘촘히 마련해야 한다. 아이가 어느 교실에 있든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다.

 

교실 끝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가 언젠가 또박또박 자신의 꿈을 말하는 날을 상상해 본다. 한 아이를 품는 일은 우리 사회의 품을 넓히는 일이다. 언어를 넘어 마음을 배우는 교실, 그곳에서 미래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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