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김기주 기자] 바다가 삶이었고, 바다가 전부였던 한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다로 다시 돌아온 두 딸이 있다.
제주 비양도의 91세 김영자 할머니.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물질을 시작해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뒤 다섯 남매를 키워낸 것도, 삶을 버텨낸 것도 오로지 물질이었다. 비양도에서도 손꼽히던 ‘상군 해녀’. 누구보다 강했고, 누구보다 바다를 사랑했다.
하지만 8년 전, 그 바다가 할머니의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를 앗아갔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해녀복을 벗었다. 평생을 함께한 바다와 등을 진 채였다.
이제는 눈이 어두워 직접 물질을 하진 못하지만, 딸들이 잡아온 해산물을 손질하며 여전히 현역 같은 기개를 드러낸다. 바다를 떠났어도, 바다는 여전히 할머니의 손끝에 남아 있다.
■“짝꿍 없이 들어가니 더 무섭지”… 그래도 바다로 향하는 딸
그런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이는 막내딸 영미(52) 씨다. 물질 2년 차, 아직은 ‘애기 해녀’지만 벌써 상군 기질을 보이는 유망주다.
원래 바다엔 언니 영실(67) 씨와 함께 들어갔다. 물속에서는 서로의 생명줄이 되어주는 짝꿍. 하지만 얼마 전, 영실 씨가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사고를 당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난 뒤 한동안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사이, 영미 씨는 홀로 바다로 나섰다.
“둘이 있을 땐 덜 무서웠는데…”
투덜대면서도, 속마음은 늘 언니 걱정뿐이다. 자매는 다시 함께 숨비소리를 내뱉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생일이 곧 기일…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 밥은 누가 차려주나”
겨울 소라가 제철인 요즘, 할머니의 마음은 바닷물보다 더 차갑게 식는다. 8년 전 돌아오지 못한 아들의 제삿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생일 무렵 세상을 떠난 아들. 기쁜 날과 슬픈 날이 한데 엉켜버렸다.
4대 독자였던 아들이 자식 없이 떠나자, 노모의 가슴엔 한이 맺혔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 제사는 누가 지내주나…”
다행히 큰딸 영실 씨의 아들 한석 씨가 비양도로 내려와 삼촌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제삿날, 집 안을 채운 가족들의 온기에 할머니는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는다.
그리고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들을 삼킨 바다를 원망하는 대신, 남겨진 두 딸의 무사 안녕을 위해 바다와 화해하기로 마음먹는다.
■흑산도 해녀 딸까지 집결… 네 모녀가 끓여 먹은 전복죽
영자 할머니의 네 딸 중 셋은 해녀다. 비양도의 영실, 영미 씨와 달리 셋째 딸 영란(61) 씨는 흑산도 해녀로 살고 있다. 젊은 시절 어머니를 따라 원정 물질을 갔다가 그곳 남자를 만나 아예 둥지를 틀었다.
겨울철 물질을 쉬는 흑산도 바다를 뒤로하고, 영란 씨가 오랜만에 친정 비양도를 찾았다. 네 모녀가 한자리에 모인 날, 영란 씨가 가져온 귀한 전복으로 죽을 끓였다.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따뜻했다.
웃음이 터지고, 옛이야기가 쏟아지고, 집 안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게 가족은 새해를 함께 맞았다.
■죽음 문턱 넘은 언니의 복귀… 바다가 건넨 첫 선물은 ‘문어’
가족의 응원 덕분이었을까. 사고 이후 대상포진까지 앓으며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졌던 영실 씨가 다시 바다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비양도 앞바다를 지키는 할망당에 무사 안녕을 빌고, 조심스레 몸을 던진다. 긴장 속 첫 물질. 그리고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건 커다란 문어 한 마리였다.
마치 바다가 건네는 인사처럼 “다시 와줘서 고맙다”는 듯한 선물이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도, 사고의 공포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숨을 참고 들어갔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와 크게 내쉬는 숨비소리처럼 영자 할머니와 딸들의 바다는, 오늘도 그렇게 희망 쪽으로 일렁이고 있다.
91세 ‘상군 해녀’ 영자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딸들이 들려주는 바다와 가족의 이야기는 오는 9일부터 13일까지 오전 7시 50분 KBS1 '인간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스컬처 김기주 kimkj@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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