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색과 침묵으로 되살린 시인의 삶, '석류의 빛깔' | 영화 속 문학 #3 | 마리끌레르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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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색과 침묵으로 되살린 시인의 삶, '석류의 빛깔' | 영화 속 문학 #3 | 마리끌레르 코리아

마리끌레르 2025-12-05 12:48:27 신고

3줄요약

억압 속에서도 자신만의 언어로 세계를 기록하고자 한 시인 사야트 노바.
영화 <석류의 빛깔>은 끝내 지워진 문장의 자리를 선명한 색과 침묵으로 채우며 기구한 운명을 위로한다.
하지만 영화 또한 오랜 세월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56년 만에 국내 스크린에서 빛을 마주하는 지금, 문학과 영화는 서로의 언어를 빌려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는다.

사야트 노바는 아르메니아의 시인으로, 사랑과 고독, 신앙과 정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한때 조지아 왕궁의 궁정시인이었으나 왕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진 죄로 추방되었고, 다시 가족을 꾸려 살았지만 아내의 죽음 이후 수도승이 되어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끝내 침략자들의 개종 강요를 거부해 순교에 가까운 죽음을 맞았다고도 전해진다.

영화 <석류의 빛깔>에는 영화의 언어로 시인의 문장과 생애를 되살리고자 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노력이 담겨있다. 사야트 노바의 시가 행간의 침묵으로 의미를 드러내듯 장면 사이에 정적을 채우고,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그의 작품처럼 아름다운 시각 언어로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하얀 천 위로 빨갛게 번지는 석류, 축축한 양털과 말라가는 책, 정면을 향해 고정된 인물들과 반복되는 동작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와 종교화 같은 구도까지. 아름다우면서도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시인이 평생 마주하던 세계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가 단순한 전기적 재현을 넘어 역사의 기억으로 읽히는 이유는 파라자노프가 이미지 하나하나에 아르메니아의 문화와 박해의 흔적을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 석류의 과즙이 빨갛게 번진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도와 흡사한 모양으로 남은 붉은 자국을 통해 시인의 삶과 더불어 아르메니아 민족이 겪어온 상처를 함께 암시한다. 양, 카펫, 해골, 악기, 교회 벽화 같은 오브제 또한 노바의 생애와 민족적 정체성을 겹쳐 보여주는 상징으로 반복된다.

1969년 완성 당시 이 영화의 제목은 <사야트 노바>였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아르메니아 민족성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제목을 <석류의 빛깔>로 바꾸게 했고, 상영도 금지했다. 파라자노프는 이후 ‘외설’과 ‘반소비에트 활동’ 혐의로 투옥되며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영화는 심각한 편집과 훼손을 겪으며 오랜 시간 어둠 속에 머물렀고, 지금 우리가 보는 버전은 수십 년에 걸친 복원을 통해 가까스로 되살아난, 감독의 의도에 가장 근접한 형태다. 56년의 기다림 끝에 스크린에서 4K로 경험하는 <석류의 빛깔>은 검열과 시대를 초월해 이룩한 저항의 기록이다. 영화는 11월 26일부터 전국 CGV와 예술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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