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전영선 기자] 대한민국 경제의 모세혈관이라 불리는 뿌리산업이 죽어가고 있다.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이 6대 뿌리산업은 반도체부터 자동차, 조선, 항공까지 모든 제조업의 기초를 떠받치는 산업의 심장이다. 그 심장이 지금 멈추려 하고 있다.
2025년 현재, 중소 제조업이 직면한 위기를 두고 학계와 현장에서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하다고 말한다. 차라리 '복합 골절(Compound Fracture)'이라는 진단이 더 정확하다. 뼈가 여러 군데서 동시에 부러진 상태.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의 '3고(高)' 현상에 인력난, 전기요금 폭등, 디지털 전환 지체까지 겹치면서, 이제 단순한 경기 순환적 침체가 아닌 산업 기반 자체의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
기자는 수많은 기업과 CEO를 만나 취재하며 한국 경제의 부침을 지켜봐왔다. IMF 외환위기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넘겼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결이 다르다. 과거의 위기가 '외부 충격'이었다면, 지금은 '내부 붕괴'다. 사람이 없고, 돈이 없고, 희망이 없다. 현장을 돌아보며 느낀 것은 절망을 넘어선 체념이었다.
■숫자가 말하는 붕괴의 징후
경제는 심리다. 기업가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실물 경제의 선행 지표다. 그 지표가 지금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2025년 12월 기준, 제조업 경기전망지수(SBHI)는 79.3을 기록하며 심리적 저지선인 80선이 붕괴됐다. 제조업 경영자 10명 중 8명이 내년도 경기를 비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경영 포기' 단계의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현장의 가동률이다. 한국 제조업의 심장부라 불리는 반월·시화 국가산업단지의 가동률이 60%대로 추락했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와 견줄 만한 수준이다.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한 최소 가동률이 75~80%임을 감안하면, 지금 대다수 중소기업은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쌓이는 '마이너스 가동'을 하고 있다. 중소기업들이 호소하는 경영 애로요인 1위는 단연 '내수 부진'으로 60% 이상이 이를 꼽았다. 그 뒤를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건비 상승'이 잇는다. 매출은 줄어드는데 비용은 치솟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형 위기다. 기업의 수익 구조가 파탄 나고 있다.
■사람이 없다...청년은 떠나고, 기술은 끊기고
뿌리산업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다. 과거 '3D 업종'이라 불리던 기피 현상은 이제 기피를 넘어 '단절'의 단계에 진입했다. 청년재단의 2025년 조사 결과는 냉혹하다. 청년층은 직업 선택의 최우선 가치로 '안정성'과 '워라밸', '성장 가능성'을 꼽는다. 반면 중소 제조기업은 낮은 임금, 열악한 환경, 불투명한 미래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청년 세대에게 기름때 묻은 작업복, 수직적 조직문화, 낙후된 복지시설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청년이 떠난 빈자리는 고령자가 채우고 있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절반 가까이가 50세 이상이다. 5~29인 규모 소기업 중 50.1%가 신규 채용 계획이 전혀 없다고 응답했다. 이는 기존 인력이 은퇴할 때까지만 공장을 돌리다 폐업하겠다는 '자연 소멸'을 선택한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기술 전수의 단절'이다. 뿌리산업의 핵심 경쟁력인 용접, 주조, 금형 기술은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축적되는 암묵지에 의존한다. 현장을 지키는 5060세대 숙련공들이 대거 은퇴하는 향후 5~10년 사이, 한국 제조업은 '제조업 치매' 현상을 맞이할 것이다. 가르칠 스승은 늙어가는데, 전수받을 제자가 없다.
■외국인 의존의 역설
내국인 구인난이 해결될 기미가 없자, 중소기업들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뿌리산업 종사 외국인은 약 6만 6천 명으로 전체의 9.2%를 차지하며, 현장 체감 의존도는 20~30%를 상회한다. "외국인 없이는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이 현실이 됐다. 그러나 급격한 외국인 인력 확대는 준비되지 않은 현장에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의 노동생산성은 내국인 대비 87.4% 수준에 불과하다. 가장 큰 원인은 언어 장벽이다. 정밀한 작업 지시가 불가능하고, 이는 불량률 증가와 안전사고 위험으로 직결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먹튀' 논란이다.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입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편하고 임금 높은 사업장으로 이직을 요구한다. 사업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태업, 무단결근, 심지어 허위 진정까지 동원해 압박한다. 한 주물 업체 대표는 "수백만 원의 알선 수수료와 수개월의 기다림 끝에 데려온 직원이 한 달 만에 다른 공장으로 가겠다며 태업을 시작했을 때의 배신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현행 고용허가제(E-9) 시스템에서는 과거 경력이나 범죄 이력, 실제 한국어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사실상 '복불복' 채용이다. 검증 시스템의 부재가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기요금 70% 폭등, 감내 불가의 임계치
2024년 4분기, 정부와 한국전력은 산업용 전기요금을 기습적으로 인상했다. 에너지 다소비 기업이 주로 쓰는 산업용(을)은 무려 10.2%나 올랐다. 최근 3년간 산업용 전기요금은 누적 70% 가까이 폭등했다. 문제는 그 충격이 전기를 '원재료'로 사용하는 뿌리산업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열처리, 주조, 금형 산업은 전기로를 24시간 가동해야 한다. 전기요금이 전체 제조 원가의 15%에서 많게는 30% 이상을 차지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원가 상승분을 납품 단가에 반영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전기요금 인상분을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기업은 전체의 22.5%에 불과하다. 나머지 77.5%는 인상분을 고스란히 자체 감내하고 있다. "전기세가 올랐으니 단가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수직적 하도급 관계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총 설문조사에서 기업들은 전기요금 인상 대응 방안으로 '설비 가동 중단 또는 축소(38%)'를 꼽았다. 전기료를 감당하지 못해 생산 자체를 포기하는 '조업 단축'이 현실화되고 있다.
■납품대금 연동제, 왜 현장에서 외면받나
원자재 가격 급등 시 그 상승분을 납품 대금에 의무 반영하도록 하는 '납품대금 연동제'가 2023년 10월부터 시행됐다. 15년 숙원 사업이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이 제도는 현장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충격적인 사실은 수탁기업(중소기업) 스스로가 연동제 계약 체결을 꺼린다는 점이다. 미연동 약정 체결 기업의 45.7%가 그 이유로 '원가 정보를 대기업에 제공하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응답했다. 원가 구조를 공개하면 향후 단가 인하 압박의 근거로 악용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원가를 까라"는 요구는 하청업체에게 영업 기밀을 넘기라는 말과 다름없다. 법이 가장 절실한 3차 협력사 같은 최약체 기업들이 오히려 예외 조항에 걸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보호의 역설'도 발생하고 있다.
■변화의 희망, 디지털 전환 성공 사례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디지털 전환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들이 있다. 대전의 에이엠솔루션즈(AM Solutions)는 금속 3D 프린팅 기술을 주조·가공 산업에 접목했다. 로봇 팔을 활용한 레이저-와이어 DED 기술로 기존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던 대형 금속 부품을 빠르게 제조한다. '깎는 제조'에서 '쌓는 제조'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용접 전문 기업 지스(Zis)는 수소연료전지 부품 제조 공정에 디지털 기술을 도입했다. 숙련공의 감에 의존하던 고난도 용접 기술을 데이터 기반으로 표준화하고 자동화했다. '암묵지의 형식지화'를 통해 인력난을 극복하고 기술 자산을 시스템화한 모범 사례다.
■골든타임의 끝자락에서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경고한다. "지금의 인력난과 고령화 추세라면 5년 내에 뿌리산업의 생산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 2025년의 대한민국 중소 제조업은 '생존이냐 소멸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인구 구조의 변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 디지털 전환의 파도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과거의 저임금 노동 집약적 방식, 수직적 하청 구조에 안주하는 기업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실효성 있는 핀셋 정책을 펼쳐야 한다. 외국인력 정예화, 뿌리산업 전용 전기요금제, 납품대금 연동제 고도화, 업종별 특화 DX 모델 보급이 시급하다. 기업은 뼈를 깎는 혁신으로 고부가가치 기술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3D 업종이라 불리던 뿌리산업이 ACE(Automatic, Clean, Easy) 산업으로 환골탈태할 때,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은 다시 힘차게 뛸 것이다.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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