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의 책꽂이 ㉚] 장선희 시집 ‘조금조금 초록 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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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의 책꽂이 ㉚] 장선희 시집 ‘조금조금 초록 벽지’

뉴스로드 2025-12-04 20:08:59 신고

▲시집 한 줄 평

“상상력으로 빚은 이미지의 만찬이다.”

▲시 한 편 

<질주> - 장선희

 

자작나무에서 걸어나온 인형을 만난 적 있다

찔린 사슴 앞에 무릎 꿇는 인디언 모하킨족을 닮았다

도망가지 않는 나무, 폭우에 온몸이 젖어도 자세를 고치지 않는다

몸속에 폭포를 숨긴 질주로 키 큰 나무

누구는 노트북으로 출근하고 누구는 트레일러를 둘러메고 출근한다 그것을 질주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사는 그림 속 나무가 흔들린다

출렁이는 것들은 질주를 꿈꾼다

나무는 제 안의 인형을 지켜낼까

질주를 막고 길이 된 자작나무 밤길을 밝히고 있다

▲시평

이 시는 자작나무의 특성과 현대인의 다양한 삶을 ‘질주’로 비유하고 있다. 시인은 자작나무 “몸속에 폭포”가 숨겨져 있고, 나무가 급속히 자라는 것은 그 안에서 물이 ‘질주’하기 때문이라 상상한다. 자작나무 속 물의 질주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으로 연결된다. “트레일러를 둘러메고 출근”은 블루칼라를, “노트북으로 출근”은 화이트칼라를 의미한다. 한데 이를 자작나무에 적용하면 트레일러는 눈에 드러나는 외적(표피) 질주를, 노트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내피) 질주를 상징한다. 안과 밖의 질주로 나무가 자라듯, 다양한 계층의 질주가 이 사회를 성장하게 한다. 또한 이 둘의 조화로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 질주의 상대편에는 멈춤이 존재한다. 바로 “갈 곳 없는 사람들”이다. 상실감과 방황으로 삶의 목표를 잃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그림 속”과 다르지 않다. 그림 속 세상은 물이나 바람이 없는 ‘정지된 곳’이다. 정지의 다른 말은 소외다. 흔들리거나 출렁이지 않는다. 빨리 달리지 않는다고, 경쟁에 뒤처졌다고 해서 달릴 의지나 꿈까지 상실한 건 아니다.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다시 달릴 수 있다. 그래야만 소중한 ‘내 것’을 지켜낼 수 있다. 세상은 질주하는 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속도 경쟁을 하지 않거나 뒤처진 사람들이 “밤길을 밝”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 안에 품고 있는 인형이나 “찔린 사슴 앞에 무릎 꿇는 인디언 모하킨족”처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모하킨족”은 사냥을 단순히 식량을 얻는 행위로 여기지 않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깊은 존경과 영적인 의미를 담았다. 시의 서두에 죽어가는 사슴과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인디언 모하킨족”을 배치한 이유가 아닐까. 결국 이 시는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연물인 자작나무를 통해 현대인의 삶, 내면의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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