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하던 일상 공간이 스마트폰 렌즈 하나로 아수라장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달린 직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조회수를 위한 '콘텐츠' 배경일 뿐이다. 그 엇갈린 시선 끝에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아무도 죽인 사람은 없다.
2025년 인천 서구 예술활동지원사업 선정작인 연극 ‘번호표’가 12월 3일 대학로 후암스테이지에서 막을 올렸다. (주)후플러스의 상주단체 프로그램 ‘예술에 담그다’의 일환으로 극단 민과 공동 제작된 이 작품은, 단순한 사건 재연을 넘어 현대 사회의 병폐를 서늘한 시선으로 파고든다.
작품의 배경은 도촌우체국이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이곳은 인플루언서 가희의 등장으로 균열이 생긴다. 촬영을 강행하려는 자와 이를 불편해하는 자들의 신경전은 결국 김 국장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다. 연극은 범인을 찾는 추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속살은 지독한 심리 사회극이다. 현장에 있던 CCTV와 부검 결과는 객관적 사실을 말해주지만, 정작 사건의 본질인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목격자 말순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고, 원인을 제공한 인플루언서 가희는 이를 철저히 '업무'라 항변한다. 우연히 현장을 찾은 만수 역시 아버지와의 해묵은 감정을 폭발시키며 상황을 꼬아놓는다. 작품은 물리적인 가해자 대신, 무책임한 말과 행동, 그리고 방관이 어떻게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영민 연출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묵직한 돌을 던진다. 그는 "우리는 종종 삶을 연기하느라 정작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며 "이 무대는 그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장치"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극 중 인물들은 각자의 상처와 죄책감을 안고 서로를 탓하기 바쁘다. 수사는 고의성 없는 과실 여부를 따지는 데 집중되지만, 관객은 안다.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해서 도의적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연극은 고도화된 감시 사회(CCTV) 속에서도 정작 인간 내면의 진실은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불통'의 시대를 꼬집는다.
극단 민의 장기인 '날 선 리얼리즘'이 이번 무대에서도 빛을 발할지 지켜볼 일이다. 그간 실험적 연출과 밀도 높은 연기로 관객과 소통해 온 극단 민은 이번에도 무대 디자인과 음향을 긴밀하게 엮어 몰입감을 높였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은 정영아 작가가 펜을 들고 정영민 연출이 지휘한다. 사건의 중심에 선 이말순 역의 이혜민을 필두로, 사건의 트리거가 되는 박가희 역에 서윤과 전희진이 더블 캐스팅됐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김만수 역은 박인환과 오규원이, 김철규 역은 안수호가 맡아 열연한다. 이 밖에도 김인숙(정미숙 역), 한정현·안재완(최형사 역), 이희준·박승훈(박형사 역) 등 탄탄한 배우진이 무대를 채운다.
제작 측은 이번 공연이 단순한 관람을 넘어, 관객 스스로가 사건의 목격자이자 배심원이 되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보는 바람엔터테인먼트가 맡았으며, 예매는 인터파크 티켓과 NOL티켓을 통해 가능하다. 공연은 12월 14일까지 이어진다.
남의 불행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소비되는 시대, 연극 '번호표'가 내민 질문은 꽤나 아프게 다가올 듯하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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