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농담』은 1968년과 1969년에 서구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슬플 수가. 프랑스에서는 번역가가 나의 문체를 완전히 바꿔 소설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영국에서는 편집자가 내적 성찰이 이어지는 모든 단락을 짧게 자르고, 음악학적인 장들을 없애 버리고, 부部들의 순서를 바꾸어 소설을 재구성했다. <13쪽>
또 다른 어느 나라. 번역자를 만나 보니, 그는 체코어를 단 한 마디도 모른다. “번역을 어떻게 하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가 “마음으로요.”라고 대답하며, 지갑에서 내 사진을 꺼내 보여 준다. 그의 태도가 너무도 호의적이어서 나는 마음의 텔레파시로 번역하는 게 진짜 가능한 줄로 믿을 뻔했다. <13쪽>
물론 나만큼 번역 문제로 몸살을 앓는 작가도 없다. 다른 작가들은 번역이 더 잘 되어서가 아니라, 번역본에 나만큼 영향을 많이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968년의 러시아 침공이 있기 전만 해도, 『농담』과 『우스운 사랑들』은 프라하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체코 독자들이 있었기에, 외국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1968년 이후, 나의 다른 소설들은 더 이상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간될 수 없었고, 캐나다의 한 작은 출판사에서만 체코어 원본으로 소량 출간되었다. <16쪽>
Beauté(et connaissance)_아름다움(과 인식)
(...) 아름다움, 그것은 더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승리다.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이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이 발하는 돌연한 빛이다. 위대한 소설들이 발하는 그 빛은 세월이 흘러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늘 인간의 실존을 망각하기에, 소설가들이 이룬 그 발견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부단히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22쪽>
Caractères_글자
책이 점점 더 작은 글자체로 출판되고 있다. 나는 티보르 데리의 책 『미완성 문장』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읽을 수가 없어서다. 요제프 로트의 문고판 『라데츠키 행진곡』도 읽을 수가 없다. 나는 문학의 종말을 상상해 본다. 글자들이 조금씩,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점점 더 작아지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는 날 말이다. <24쪽>
Inexpérience_미경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처음 제목은 ‘미경험의 행성’이었다. 인간 조건의 한 특성으로서의 미경험. 우리는 단 한 번만 태어나며, 결코 이전 삶의 경험을 갖고 다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우리는 젊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고, 결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결혼하며,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즉 노인들은 자신의 노년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지구는 미경험의 행성이다. <42~43쪽>
사람들은 소국은 당연히 대국을 모방하리라고 가정한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것들은 서로 아주 다르기도 하다. 소국의 관점은 대국의 관점이 아니다. 소국들의 유럽은 다른 유럽이며, 다른 시선을 가지며, 그 사상은 종종 대국들의 유럽과 완전한 대위를 이루기도 한다. <99쪽>
유명한 카프카 전기를 쓴 클라우스 바겐바흐는 체코어도 모르면서, 즉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프라하와 그 문화를 책에서 장황하게 살핀다. 그가 프라하를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곳, 위대한 고독자의 작품이 길 잃은 운석처럼 떨어진, 시대에 좀 뒤진 한 지방 도시쯤으로만 여기는 이유는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당시 프라하는 결코 지방의 한 도시가 아니었다. <113쪽>
이제는 사람들이 알까. 프라하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단지 인권과 민주주의와 정의 등등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거기에서, 하나의 위대한 문화 전체가 불타고 있다는 것을. <130쪽>
『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 김병욱 옮김 | 민음사 펴냄 | 132쪽 | 15,000원
[정리=유청희 기자]
[썸네일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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